주선미 시인 / 소금꽃
바닥으로 내려앉은 잿빛 하늘 걷어내며 툭 터진 곳 찾아다니다 곰소 염전 앞에 선다
떠밀리고 떠밀리다 곰소에 든 이국의 바다 수차에 감아 돌리고 있는 새까만 발의 염부
청새치와 사투 벌이는 노인의 바다 소용돌이에 잠겼다가 거친 파도에도 견디는 갯바위 눈이 되었다가 한나절 검은 갯벌 진창이 되었다가 진한 국물처럼 세파 다 담은 물 퍼 올렸을,
땀범벅 된 등 딛고 염전으로 흘러들어 탈출구 없는 사각의 모서리 안 이기심으로 쏟아붓는 뙤약볕 이기고 꽃 피워 올리기까지 견뎌냈을 소금의 뼈
겨울로 기울어지는 길목 보이지 않는 벽에 갇혀 사금파리 깨진 조각 검은 아픔처럼 콕콕 박혀 있는 짜디짠 삶,
있는 힘 모조리 쏟아붓는 산고는 끝났으나 어깨 하나 기댈 데 없는 여자처럼 소금기만 바삭하게 서 있는 빈 가슴을 본다
주선미 시인 / 무인 카페
벼랑 위까지 쑥쑥 혀 날름거리는 거친 파랑에 실린 낮달 잘 벼려진 갯바위 딛으며 건져도 하나도 두렵지 않다
낮달 복판으로 이어진 애월 바닷길 빨려들어 가는지도 모른 채 파도의 혀에 삼켜질 걸음 무인카페 덜컹거리는 문이 불러 세운다
캐시박스 지키는 사람 보이지 않고 벽마다 빼곡히 들어앉은 메모지들 친구처럼 조잘대고 있다
누가 볼까 급하게 흘려 쓴 '나 너를 사랑하는 것 같아' 큰 하트 그려 창문에 붙여놓았던 손 편지 비집고 뒤적여도 간 곳 없다 내 사랑 이야기 대신 자리 잡은
잊지 못하겠다 힘내자 십 년 후에는 집 한 채 마련하자 군대 잘 갔다 와 기다릴 께 결의를 다지듯 따스하게 스크럼을 짠 어깨 풀지 않는다
창틀을 훌쩍 넘어온 파도로 바닥 깊은 머그잔 헹구어 따뜻한 커피 한 잔 담아 띄운 낮달 그리움이 있어 살만하다 귀뜸한다
벼랑에 안겨 다 부서지고도 훌훌 털고 높은 방파제 넘어 너에게로 간다 꺼진 신호등 너머 길이 사라졌을 때 비로소 또렷이 드러나는 길 따라 감전된 듯 애월 앞바다에 든다 영화를 보다
주선미 시인 / 고흐, 영원의 문에서
베이커리에서 갓 구운 듯 노랗게 타는 아를르의 저녁놀 뒤로한 채 펼쳐진 꼬여 있는 길 한 가닥 고흐의 일생인 듯 화폭에 정지해 있다 그림 그리는 법은 따로 없다는 듯 자유로운 고흐의 붓 아를르의 저녁을 까마귀 빛으로 북북 칠해 나간다
끼니도 잊은 채 화폭을 메워도 그림은 팔리지 않고 죄어오는 밀린 하숙비 한 병의 술값으로 빼앗긴 고흐 청보리 넘실거리는 보리밭 화폭에 옮겨 담은 것은 배가 고팠기 때문일까
들리지 않는 세상의 말 조금이라도 더 가깝게 들으려고 귀까지 잘랐지만 파리로 가는 길 자꾸만 멀어지고 그림을 그릴수록 더욱 쌓이는 빚 너머 등 돌린 세상은 돈의 무게만 저울질한다
총 맞아 피가 멈추지 않는 고흐를 앞에 두고도 하숙비로 꼬박꼬박 그림 받아둔 하숙집 주인 머릿속은 그림 값에만 촉을 세웠으리라
고흐의 기호 제대로 읽어주는 동생 테오 태운 기차는 연착하고 장례식도 외면한 채 숨겨둔 그림 너나없이 나눠 가진 마을 사람들 머릿속도 치솟는 그림 값 계산에 몰두했으리라
보란 듯이 돈을 벗어 던진 채 영혼만은 자유를 택한 화가 고흐
자유로운 영혼은 무게를 저울질할 수 없다고 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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