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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시인과 시(현대)

주선미 시인 / 소금꽃 외 2편

by 파스칼바이런 2021. 10. 14.

주선미 시인 / 소금꽃

 

 

바닥으로 내려앉은 잿빛 하늘 걷어내며

툭 터진 곳 찾아다니다 곰소 염전 앞에 선다

 

떠밀리고 떠밀리다 곰소에 든

이국의 바다 수차에 감아 돌리고 있는 새까만 발의 염부

 

청새치와 사투 벌이는 노인의 바다 소용돌이에 잠겼다가

거친 파도에도 견디는 갯바위 눈이 되었다가

한나절 검은 갯벌 진창이 되었다가

진한 국물처럼 세파 다 담은 물 퍼 올렸을,

 

땀범벅 된 등 딛고 염전으로 흘러들어

탈출구 없는 사각의 모서리 안

이기심으로 쏟아붓는 뙤약볕 이기고

꽃 피워 올리기까지 견뎌냈을 소금의 뼈

 

겨울로 기울어지는 길목

보이지 않는 벽에 갇혀

사금파리 깨진 조각 검은 아픔처럼 콕콕 박혀 있는

짜디짠 삶,

 

있는 힘 모조리 쏟아붓는 산고는 끝났으나

어깨 하나 기댈 데 없는 여자처럼

소금기만 바삭하게 서 있는 빈 가슴을 본다

 

 


 

 

주선미 시인 / 무인 카페

 

 

벼랑 위까지 쑥쑥 혀 날름거리는

거친 파랑에 실린 낮달

잘 벼려진 갯바위 딛으며 건져도

하나도 두렵지 않다

 

낮달 복판으로 이어진 애월 바닷길

빨려들어 가는지도 모른 채

파도의 혀에 삼켜질 걸음

무인카페 덜컹거리는 문이 불러 세운다

 

캐시박스 지키는 사람 보이지 않고

벽마다 빼곡히 들어앉은 메모지들

친구처럼 조잘대고 있다

 

누가 볼까 급하게 흘려 쓴

'나 너를 사랑하는 것 같아'

큰 하트 그려 창문에 붙여놓았던 손 편지

비집고 뒤적여도 간 곳 없다

내 사랑 이야기 대신 자리 잡은

 

잊지 못하겠다

힘내자

십 년 후에는 집 한 채 마련하자

군대 잘 갔다 와 기다릴 께

결의를 다지듯

따스하게 스크럼을 짠 어깨 풀지 않는다

 

창틀을 훌쩍 넘어온 파도로

바닥 깊은 머그잔 헹구어

따뜻한 커피 한 잔 담아 띄운 낮달

그리움이 있어 살만하다 귀뜸한다

 

벼랑에 안겨 다 부서지고도

훌훌 털고 높은 방파제 넘어 너에게로 간다

꺼진 신호등 너머

길이 사라졌을 때

비로소 또렷이 드러나는 길 따라

감전된 듯 애월 앞바다에 든다

영화를 보다

 

 


 

 

주선미 시인 / 고흐, 영원의 문에서

 

 

베이커리에서 갓 구운 듯 노랗게 타는

아를르의 저녁놀 뒤로한 채 펼쳐진

꼬여 있는 길 한 가닥

고흐의 일생인 듯 화폭에 정지해 있다

그림 그리는 법은 따로 없다는 듯 자유로운

고흐의 붓

아를르의 저녁을 까마귀 빛으로

북북 칠해 나간다

 

끼니도 잊은 채 화폭을 메워도

그림은 팔리지 않고

죄어오는 밀린 하숙비

한 병의 술값으로 빼앗긴 고흐

청보리 넘실거리는 보리밭

화폭에 옮겨 담은 것은 배가 고팠기 때문일까

 

들리지 않는 세상의 말

조금이라도 더 가깝게 들으려고

귀까지 잘랐지만

파리로 가는 길 자꾸만 멀어지고

그림을 그릴수록 더욱 쌓이는 빚 너머

등 돌린 세상은

돈의 무게만 저울질한다

 

총 맞아 피가 멈추지 않는

고흐를 앞에 두고도

하숙비로 꼬박꼬박 그림 받아둔 하숙집 주인

머릿속은 그림 값에만 촉을 세웠으리라

 

고흐의 기호 제대로 읽어주는

동생 테오 태운 기차는 연착하고

장례식도 외면한 채

숨겨둔 그림 너나없이 나눠 가진

마을 사람들 머릿속도

치솟는 그림 값 계산에 몰두했으리라

 

보란 듯이 돈을 벗어 던진 채

영혼만은 자유를 택한 화가 고흐

 

자유로운 영혼은

무게를 저울질할 수 없다고 말한다

 

 


 

주선미 시인

충남 태안 출생. 2017년《시와 문화》신인상 등단. 시집『안면도 가는 길』,『일몰, 와온 바다에서』가 있음. 《시와 문화》2019 젊은 시인상, 충남문화재단창작기금 수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