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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시인과 시(현대)

정서희 시인 / 국수 외 2편

by 파스칼바이런 2021. 10. 13.

정서희 시인 / 국수

 

 

저,

가마솥에서 끓고 있는 물이 젊은 엄마일지도 모르네

 

어떻게 오셨나요

메게이스*를 처방받을 수 있을까요

 

아카시아 이팝나무 꽃들이 휙휙 달리는 초여름

국수 한 대접 훌훌 말아 드시곤 한 덩이 더 담아내던 엄마

 

지금 가마솥에서 끓고 있는 물, 엄마가 우려낸 젊은 엄마일지도 모르네

 

열무 넣고 보리밥 슥슥 비벼 숟가락 부딪치며 먹던 때가 생각나나요

양은냄비 바닥에 깔린 밥마저 자식에게 물리시고 저만치 떨어져 앉으시더니

 

이젠 입맛으로부터 멀리 떨어져 앉으신 어머니

오오

 

지금 가마솥에서 끓고 있는 물,

우리 엄마가 팔순 지나고 아흔이 되어 비로소

우려낸 현탁액인가요

 

*메게이스내복현탁액(Megace oral susp.) : 식욕을 증진시킴으로써 암환자 및 에이즈환자의 식욕부진 및 체중감소를 개선시켜주는 약

 

 


 

 

정서희 시인 / 길

 

 

산복도로 내리막에서

차들이 헐레벌떡 뛰어오는데

허공을 향해 사지가 버둥질 대더니

길고양이 한 마리 널브러진다

위험물 적재 꼬리표 매단 화물차

이삿짐 가득 실은 트럭

육중한 몸으로 굴러오는데

초록 불 켜지면 어디로 가나

구급차 사이렌 이명처럼

내 몸이 불에 닿은 듯

맷돌 밑 조각처럼 납작해져

무어라 소리칠 틈도 없이

왕왕거리는 딱딱한 짐승들

기름기 핏기 다 빨아먹고

윤기 흐르는 산복도로

잽싸게 모퉁이 돈다

마침내 평평한 길이 된

길고양이.

 

 


 

 

정서희 시인 / 모국어 굽는 삼포트*

 

 

주공 아파트 주차장 지나

초등학교 어린이 보호구역 비켜서서

메타세콰이어 근골 얽힌 옆자리

스물둘 캄보디아 여자 메싸는

오늘도 형틀에 매인 물고기를 잡는다

삼촌뻘 신랑은 또 어느 노름방에

열쇠처럼 매달려있으려나

종일 반죽 붓는 주전자 입술로 부른

따뜻한 붕어빵 세 개 천 원

동전 몇 닢 들고 찾아온 아이를 보자

이역만리 떨어진 동생 생각에

아이 귓불을 잡아당기곤 방긋

모국어를 굽기 시작한다

하루에도 수십 번 천막 안으로

돈 통을 후루루 몰아치는 겨울

식솔이 된 플라스틱 의자 끌어모으면

갈 시간이다

떨이처럼 담긴 삼포트 한 마리

 

메싸,

 

*삼포트 : 캄보디아 여성이 입는 전통 의상

 

 


 

정서희 시인

1966년 충남 서산 출생, 본명 정선희 목원대학교 신학과, 경남대학교 국문학과 석사 졸업. 창원대학교 국문학과 박사과정 중.