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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시인과 시(현대)

정선우 시인 / 어제의 모과 외 4편

by 파스칼바이런 2021. 10. 13.

정선우 시인 / 어제의 모과

 

 

그림자를 물고 날아가 버린 새는

그림자를 통째로 잃고 하루를 잃고

다시 날아오지 않는다

 

접근금지구역이 된 나무에서

썩은 모과 냄새가 이방인처럼 건너왔다

꽃을 잃고 모과는 더 이상 모과가 아니다

굴러온 모과는 썩으며 흘러내린다

모과를 듣다가 시꺼먼 모과를 만지다가 손등 같은

흙 속에 꾹꾹 파묻은 가을

 

모과는 가벼운 비문으로 시작된다

모과나무 건너 언덕길에 누군가

흔들리는 어깨와 붉어진 눈

저승꽃 같이 까만

블라우스가 휘적휘적, 지나간다

 

시간은 너무 빠르게

어제 읽은 나무의 마지막 물음을 떨어뜨린다

얼룩진 바닥은 나무의 유언장

모두의 모과들 한때의 어제로 적힌다

 

 


 

 

정선우 시인 / 붉은 입술, 아다

 

 

아무것도 말하지 않을

혹은

말하고 싶은 모든 것을 말함

 

동그란 붉은 입술, 남천 열매 같은

그 입술 앞으로

세상의 모든 소리들이 다녀갔다

 

탁목조의 모든 소리는

탁목조에게서 나오고

 

꽃 같은 말의 간격을 배우는, 아다

비밀스런 손가락 움직임을 따라

붉은 부리를 물고 새가 날아간다

 

혓바닥 깊은 무늬 하나 새긴

비애를 녹여 먹던 붉디붉은 입술

몽유의 미혹을 삼키고 더욱 또렷해진다

폭죽 터지듯 붉은 입술 햇살을 바른다

 

내내 입속에서 끊어질 듯 말 듯

재탕되는 말들이 혓바닥을 굴리며

흘러내리고 사라지려 하고,

 

- 시집 <모두의 모과들> 정선우시인, 천년의시작, 2018년.

 

 


 

 

정선우 시인 / 흔들리다

 

 

바닥이 흔들린다

어깨를 들썩이며

 

은행나무의 은행이 눈물처럼 떨어져 내린다

별의 반짝임을 받아 적던 석탑의 두부가

두부처럼 흔들린다

숨죽이며 석탑을 읽는 잎과 입이 분절된다

 

오랫동안 흙격지에 묻혔던 쐐기의 문장이 떠들썩하다

몸으로 받아쓴 촘촘한 주름들

바닥 저 깊은 돌의 시간이

벌레 먹은 알밤의 숨구멍이 되었다

수백 년을 견딘 깍지가 풀리고 있다

 

비스듬히  

 

열어보지 않아도 의심스러운

속내가 쩍쩍 틀어지고 있다

민감한 소문을 물고 뜯고 아수라장이다

새들이 어디론가 사라지고 있다

 

찰나의 햇살이 은행잎을 움켜쥔다

 

*흙격지 : 지층과 지층 사이

 

- 시집 <모두의 모과들> 정선우시인, 천년의시작, 2018년.

 

 


 

 

정선우 시인 / 푸른 감자가 있는 풍경

 

 

손톱자국입니까

궁금한 흉터에서 죄다 싹이 트고 있어요

창문을 여는 동안 중천 어디에도 해는 보이지 않네요

굴러가는 감자의 향방이 궁금해요

감자를 쥐고 구석에 앉아요

몸이 가려워요

나도 모르게 곪아 있던 것들

감자분처럼 이내 목이 메는 휴일이에요

잘라도 다시 자라나 그만큼을 물고 늘어지는 시간

25시 편의점엔 아무도 보이지 않네요

불빛만 오후를 졸고 있어요

 

누구의 부재입니까

하얗게 속을 드러낸 가슴 언저리

오랜 고적함이 포슬포슬 벗겨져요

열대어가 살지 않는 빗살무늬 어항에

푸른 감자가 쪼글쪼글해요

열대어가 알을 낳듯 여린 싹들이

지느러미를 흔드는 오후예요

 

 


 

 

정선우 시인 / Mr. Pegasus

 

 

별은 금방 자랄 거라고 했다

석간신문을 뜯어먹고

하루치의 의미를 소화중이다

날개를 던져버린 옆구리가 시시하다

굴러다니는 고삐를 찬 우유부단한 맨발

물구나무를 서서 그냥 자란다

바닥을 일으켜 세우면 페가수스*처럼

용감해졌다 별사탕 한 움큼 쏟아진다

 

좋은 별자리를 키울

서쪽 문을 열고 별빛을 부르는 손짓

별은 별꽃으로 몸 바꾸려 한다

밤마다 푸른 자장가를 불러야 했다

밤새도록 별을 다독이는 마두금

문지를수록 더 깊어진 어둠

별꽃이 무덕무덕 피어나는

은하는 수레를 타고 천천히 굴러간다

캄캄하고 매끄러운 뒷모습

구만 리나 더 멀리 별을 키우고

천상의 부스러기 별의별로 환승 한다

 

*그리스 신화에 나오는 날개 돋친 천마(天馬).

 

 


 

정선우 시인

부산에서 출생. 2015년《시와 사람》으로 등단. 시집으로 『모두의 모과들』이 있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