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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시인과 시(현대)

서영처 시인 / 얼룩말 외 1편

by 파스칼바이런 2021. 10. 13.

서영처 시인 / 얼룩말

 

 

울렁거리는 지층에서 태어났다

검은 줄과 흰 줄의 팽팽한 줄다리기다

터질 듯한 생기로 뛰어다니는 놈을 사로잡기만 하면 세상에 없는 희귀한 소리를 얻을 수 있을 거다

엉덩이를 한 대 치면 무서운 속도로 가청권 밖의 음역으로 내달릴 거다

이 지역의 등고선을 입은 말

얼룩이 상처라면

덜룩은 그만큼의 공백

얼룩이 눈물자국이라면

덜룩은 빠져나오기 어려운 그늘

울타리 밖의 삶을 기웃거리지만 울타리 안에 스스로를 가둔

말은 이따금 제 안의 파도를 뚫고 나온다

얼룩, 안간힘으로 울타리를 부순 흔적

산등성이 촘촘한 다랑논과 논두렁의 고단함 같은

이젠 악기도 가구도 아닌 피아노처럼

검은말도 흰말도 아닌 모호한 말

내가 만든 철창에 다시 갇히는 말

 

월간 『시인동네』 2019년 11월호 발표

 

 


 

 

서영처 시인 / 경계

 

 

땅만 보며 서 있는 가로등이었다 어두운 모퉁이에서 고개를 숙이고 있는

 

차량들이 속도를 내며 달리는 도로가에 성냥팔이 소녀가 사라진 자리에

 

성냥개비처럼 서 있는 가로등이었다

 

키만 자라 외눈박이 거인처럼 슬픈 눈으로 서있는 가로등이었다

 

수런거리며 콩나물 대가리처럼 기하급수적으로 번식하는 가로등이었다

 

세상은 소리에 들어있다고

시끄러운 도심에서 자신들의 음악을 심고 있다

껌벅거리며 음정을 맞추고 있다

 

느릅나무처럼 자라는 시가지

죽은 가지에 옹이처럼 맺힌 집들

 

번지수가 커가는 거리를 따라 늑대도 아닌 가로등이 하울링을 한다

차가운 달을 한 덩이씩 문다

 

재앙이 스며들어 인적이 끊긴 거리

언덕을 따라 불 꺼진 집들이 거꾸로 매달려 잠이 든다

 

느릅나무 잎들이 떨어지는 막다른 골목을 향해

부적을 문 쥐가 털을 곧추세우고 달려간다

 

월간 『현대시』 2020년 8월호 발표

 

 


 

서영처 시인

경북 영천에서 출생. 경북대학교 음악과에서 바이올린 전공. 영남대학교 국문학 박사과정 졸업. 2003년 계간 《문학 . 판》에 〈돌멩이에 날개가 달려있다〉 외 5편의 시를 발표하며 등단. 저서로는 시집으로 『피아노 악어』(열림원, 2006), 『말뚝에 묶인 피아노』(문학과지성사, 2015)와 산문집 『지금은 클래식을 들을 시간』, 『노래의 시대』, 『예배당 순례』가 있음. 웹진 『시인광장』 편집위원 역임. 현재 계명대학교 타불라라사 칼리지 교수로 재직 중.