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 시인과 시(현대)

나희덕 시인 / 홍적기의 새들 외 1편

by 파스칼바이런 2021. 10. 13.

나희덕 시인 / 홍적기의 새들

 

 

거대한 공룡은 사라졌지만

물고기와 새와 인간은 왜 살아남았는가

깃털을 잃어버린 새들은

왜 점점 날카로운 부리를 지니게 되는가

침엽수들은 얼마나 더 뾰족해질 것인가

메마른 가지에는 왜 가시가 돋아나기 시작하는가

새들은 왜 새벽부터 울고 있는가

어둠은 울음을 통해 무엇을 가져다주려 하는가

해를 삼킨 것은 누구인가

비닐이나 표류물들은 어디에 쌓이는가

새로운 빙하기는 언제 끝나는가

왜 얼음덩어리들뿐인가

까마귀는 어디 있는가 지빠귀는 어디 있는가

히드라는 지금도 자라고 있는가

하나가 잘려나가면

정말 두 개의 머리가 돋아나는가

잘려나간 머리에서는 얼마나 많은 피가 흘러나왔는가

얼마나 많은 피가 하수구로 흘러내렸는가

살육의 증거들은 왜 희미해지는가

하늘과 땅 사이에 휘몰아치던 바람은 고요해졌는가

돌멩이들은 왜 날아오르지 않는가

이 뱀들은 어디서 왔는가

죽은 새들은 어디로 갔는가

새들마저 다 죽으면 홍적기 다음에 무엇이 오는가

 

무크 『포에트리 슬램』 2019년 제5호 발표

 

 


 

 

나희덕 시인 / 곰의 내장 속에서만

 

 

괴혈병이 걸리면 더이상 고기를 씹을 수 없게 되고

북극에서 그것은 죽음을 의미하는 것

 

북극에서는 죽어도 썩을 수가 없다지

유빙들 사이로 떠다니며 영원히 잠들 수 없다지

 

죽으러 갈 수 있는 곳은

북극곰의 내장,

따뜻한 내장 속에서만 천천히 사라질 수 있을 뿐

 

아들은 병든 어머니를 업고 가서 얼음 벌판에 내려놓고

어머니를 곰에게 먹이로 바치고

어머니는 어서 가라, 아들에게 손을 흔들고

아들은 몇 번이나 뒤를 돌아보고

언젠가 자신이 묻힐 곰의 캄캄한 내장 속을 생각하고

 

이글루 속에서

이글루 속에서

 

아이들은 자라고

아이들의 이도 자라고

물개나 바다표범을 사냥하는 법을 배우고

 

곰을 잡아 곰고기도 먹지만

이누이트 족이 곰의 내장을 먹지 않는 건 그래서일까*

 

더운 그것이 어머니의 무덤인 것만 같아서

아직 그 속에 남아 있는 것만 같아서

 

* 실제로는 곰의 내장에 치사량의 고농도 비타민A가 들어 있기 때문이라고 한다.

 

Littor(릿터) 2021년 6~7월호, 제30호 민음사 발표

 

 


 

나희덕 시인

1989년 《중앙일보》 신춘문예에 시 〈뿌리에게〉 당선되어 등단.  저서로는 시집으로 『뿌리에게』, 『그 말이 잎을 물들였다』,『그곳이 멀지 않다』, 『어두워진다는 것』, 『사라진 손바닥』, 『야생사과』, 『말들이 돌아오는 시간』, 『그녀에게』, 『파일명 서정시』등과 시론집 『보랏빛은 어디에서 오는가』,『한 접시의 시』 등과 산문집 『반통의 물』, 『저 불빛들을 기억해』, 『한 걸음씩 걸어서 거기 도착하려네』가 있음. 김수영문학상, 김달진문학상, 현대문학상 등을 수상. 현재 서울과학기술대학교 문예창작학과 교수로 재직 중.