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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시인과 시(현대)

서종택 시인 / 풀 외 4편

by 파스칼바이런 2021. 10. 13.

서종택 시인 / 풀

 

 

평생 한 번도

바람에 거슬러 본 적 없었다

발목이 흙에 붙잡혀

한 발자국도 옮겨보지 못했다

눈이 낮아

하늘 한 번 쳐다보지 뭇했다

발바닥 밑 세상도 생각하지 못했다

그러나 내 마음 속에

너무나 많은 움직임이 있었으므로

참, 모질게도, 나는 살았다

 

 


 

 

서종택 시인 / 이슬

 

 

들여다보아도

또 들여다보아도

아무것도 보이지 않기 때문에

보는 사람마다

자꾸자꾸 들여다보았으므로

마침내 눈망울이 되어버린

물방울

 

 


 

 

서종택 시인 / 호루루기

 

 

 우리집 은행나무 아래로 부는 바람의 어깨가 절반쯤 노랗게 물든 날이었습니다. 그날은 학교 가는 길에 휘파람을 불면서 골목길에 가득한 햇살을 가볍게 밀어제치기도 하였습니다. 애들은 운동장에서 흙먼지를 풀풀 날리며 뛰어다니고 햇살 드문드문 섞인 웃음소리는 느릅나무 그늘에 깔렸습니다. 선생님의 긴 호루루기 소리가 우리들의 잘 차려 입은 옷자락을 스치며 길을 떠나고 그 뒤를 따라가는 엷은 발꿈치는 즐거운 생각으로 뒤덮여 어지러웠습니다. 손에 손을 잡고 국민학교 1학년 때부터 배운 노래들을 모두 불렀습니다. 하마 목이 쉰 노래까지 섞어부르며 우리를 이어주는 여리대 여린 손가락에다 하늘이나 걸어놓고 먼먼 앞날 같은 것을 약속했어요. 어떤 노래는 하늘 끝으로 날아가고 어떤 노래는 길가 플라타너스로 날아가 더러는 그 큰 잎사귀 위에 잠시 앉아 쉬기도 하였습니다.

 

 도회지를 벗어나자 길은 한결 싱싱해지고 풀잎으로 파랗게 반짝이는 것이 여간 아름다운 게 아니었습니다. 우리들은 더욱 애들의 운동화를 걸어 넘어뜨리고 준비해 둔 몇 가지의 웃음을 재빨리 넣어주곤 하였습니다. 그러면 넘어진 애는 눈을 가늘게 흘기면서 살짝 토라지는 것이었지만 사과를 먹으면서 오던 다른 애가 보기 좋게 나동그라졌을 땐 누구보다 더 커다랗고 굴곡이 맑은 웃음을 그 애의 운동화에 꽉 차게 넣어주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아무튼 그렇듯이 가는 길 위에서 일어나는 일들은 비록 실수라 할지라도 금방 예쁘게 포장이 되어 누구나 갖고 싶어 하는 참한 것이 되는 것이었습니다. 이따금 머리를 들면 높은 산에서 내려오는 바람은 우리들의 귀밑 머리카락을 낱낱이 적셔주었고 한 이십 리쯤 내어다 보이는 하늘에는 호루루기 소리가 하나 둘 날아가는 것이 보였습니다.

 

* 1976년 서울신문 신춘문예 당선시

 

 


 

 

서종택 시인 / 그리운 사람

 

 

첩첩산중 길을 잃었다

사람소리 물소리 없는 곳에서

구두를 망가뜨리며 나는 걸었다

아무도 갈지 않은 땅

비가 내려도 젖지 않았다

새들도 없이 하늘은

나직이 내려와 있고

알지 못할 작은 꽃

키 큰 잡초들

지나가는 바람 소리 칼날 같았다

다람쥐만 지나가도 깜짝 놀랐다

눈을 크게 뜨고

숨을 헐떡이며

사람을 만나

다시 사람이 되고 싶었다

 

 


 

 

서종택 시인 / 강물을 보며

 

 

높은 곳에서 낮은 곳으로

산과 들과 햇빛을 운반하는

강물이 있다

우리들 마주 보는 어린 시절과

함께 읽어야 할 눈물 속에도

둑도 없이 묻혀 흐르는

강물이 있다

사랑하고 미워하는 사람들 사이

흐르는 물의 뒤를 씻기 위하여

강바닥 자갈들 옮겨 놓으며

다시 흐르는 강물이 있다

나무 뿌리 속으로 모래 속으로

흘러간 세월과 가시덤불 사이

꽃을 피우고 숲을 이루며

세계를 이어주는 강물이 있다

 

 


 

서종택(徐宗澤) 시인

1948년 경북 군위 출생. 경북대 사대 역사교육과를 졸업. 1976년 서울신문 신춘문예에 박목월시인에 의해 시 <호루라기>가 당선 되어 등단. 2000년 첫시집『 보물찾기 』(시와시학사) 펴냄. '신감각' 동인. 대구시인협회장, 대구대학교 겸임교수 역임. 현재 영신중 교장으로 재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