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 시인과 시(현대)

사윤수 시인 / 샴푸 어강됴리 외 2편

by 파스칼바이런 2021. 10. 13.

사윤수 시인 / 샴푸 어강됴리

 

 

  샴푸 통에 깨알같이 적힌 샴푸 성분을 읽는다

  성분의 세계가 번뇌 망상 따개비다

  이걸 삼대 구 년 치성으로 머리에 칠하고 문지르면

  언젠가 거품처럼 상상의 나래가 부풀어 오를까

  샴푸의 요정으로 변할까

  저 성분들,

  귀신이 씨나락 까먹다가 목말라 물 먹으러 가다가

  문지방에 걸려 넘어지는 소리 같군

  요정이나 귀신이나 한통속이지

  저 마흔네 가지 성분을 뒤죽박죽 섞으면

  트콜커터롤 코피즈틴룸 콘페벤

  암모메틸 벤제메틸 이소치아 졸리논 졸리논!

  아, 뭔가 환상적인 주문 같잖아

  아랍국가 왕족 이름 같고

  귀신 아니고는 찾아갈 수 없는 사막의 이름 같기도 하잖아

  어쨌거나 손상된 머리에는

  영양과 윤기를 줄 마법이 필요하대

 

  그래도 당신은 샴푸하지 마

  일 년 열석 달 윤기 없이

  푸석푸석 봉두난발도 좋아

  거품 빼고, 사막에서 헤매지 말고

  그냥 보따리 싸서 내게로 와

  내가 손상 없이 영양만 줄게

  반짝반짝 왕으로 만들어줄게

  어긔야 어강됴리

  아으, 다롱디리!

 

  —『그리고, 라는 저녁 무렵』(시인동네, 2019)

 

 


 

 

사윤수 시인 / 리스본 2

-호카 곶

 

 

와보지 않아도 될 줄 알면서 왔습니다

바다와 등대뿐인 줄 알면서도 와보고 싶었습니다

 

시든 자국을 보니

지나간 오월엔

노란 칼잎막사국꽃이 이곳을 뒤덮었겠군요

꿈만 같았겠군요

 

끝까지 가본다는 것

 

끝에서는

돌아가지 않거나

되돌아가는 길 뿐이겠지요

그럴 줄 알면서도 끝까지 가보고 싶었지요

 

이곳 기념품 가게에는 팔지 않는

끝이라는 말

 

당신처럼 참, 칼 같고 끝스럽고

깨끗

합니다

 

*호카 곶 - 포르투갈에 있는 유라시아 대륙 최서단 곶

 

 


 

 

사윤수 시인 / 빨래가 마르는 시간

 

 

마치 아무 일 없었다는 듯 빨래가 널려 있다

이동 건조대 가득 큰 대자로

위쪽은 나란히 직수굿하고

아래는 넌출진 구비를 드리운다

세탁기 속에서 혼비백산

그 컴컴하고 거친 물살을 통과한 기억이

빨래에게는 없는 것 같다

머릿속까지 표백되었을지도 모르니

 

세상에는 매달려서 견디는 것들이 많다

 

나도 어떤 것에 안간힘으로 매달려

한사코 떨어지지 않으려던 때가 있었다

외줄을 잡고 젖은 빨래처럼 허공에서 뒤채었다

씨앗이 여무는 시간도 그러했으리라

양팔 가득히 빨래를 걸치고 서 있는 건조대가

수령 오래된 한 그루 빨래나무 같다

 

은결든 물기와 구김을 다림질해 주듯

햇볕이 자근자근 빨래의 등뼈를 밟고 다닌다

어느 어진 이의 심성과 순교의 윤회일까

제 본분인 양 빨래는

모짝모짝 부지런히 말라간다

마치 아무 일 없다는 듯

그 배경에 잠풀 향기 은은하다

 

 


 

사윤수 시인

1964년 경북 청도에서 출생. 영남대학교 철학과 졸업. 2011년 《현대시학》으로 등단. 시집으로 <파온(婆?)> <그리고,라는 저녁무렵> 2009년 한국문화 예술위원회 문예진흥기금 수혜. 웹진 『시인광장』 편집위원 역임. 시집 『파온』 『그리고, 라는 저녁 무렵』