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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시인과 시(현대)

김미소 시인 / 다정한 돼지 외 2편

by 파스칼바이런 2021. 10. 13.

김미소 시인 / 다정한 돼지

 

 

 그건 이미 지나간 구름, 감정 없는 인간을 고기라고 부르자, 다정한 가족을 해체하고 싶다 정숙하지 않은 기분을 숙성시켜야지, 가끔은 냉동고 속 근황을 살핀다 돼지들은 잘 있습니까 아무쪼록 변질되지 않는다 돼지는 돼지일 텐데, 냉동고 틈 사이로 흐르는 핏물은 왜 흥건해지는 걸까 바닥이 고이는 건 왜 도축 당한 사람은 아무도 없는데 피를 흘리잖아, 틈을 노리잖아 이건 냉동고 옆 망초꽃이 어른이 되어도 밥을 굶어도 키가 자꾸만 자라는 것과 같은 일, 죽어서도 등급을 얻습니까 어른이 된 것 같았는데, 완성된 인격인 줄 알았는데…. 변이된 돼지입니까 돼지들은 그들만의 언어로 답한다 꿀꿀, 그래, 진화하는 돼지가 돼야지, 회피하는 창문과 문밖의 사정, 누군가 고기를 굽는지 연기가 피어오르는 금요일 화목한 돼지들은 사려 깊은 저녁을 품고 사니까, 그걸 행복이라 말하면 눈이 따갑다 돼지의 얼굴이 일그러진다 돼지와 나의 그림자가 겹친다 두 손으로 표정을 움켜쥐며 걸어 들어간다 전원이 꺼진 냉동고로.

 

 


 

 

김미소 시인 / 버그(bug)*

 

 

 오리가 픽픽 쓰러졌다 꽥꽥, 매몰지의 악몽이 되살아난다 누가 저 지층을 뚫어 엿보았을까 구멍 주변으로 대기의 이목이 집중되었다 꽥꽥, 앓는 부위를 쪼아내듯 비가 내린다 마른 얼룩은 불어나고 울음이 박피된 표피처럼 떨어져 나간다 꽥꽥, 구멍 아래로 구정물이 통과한다 녹조를 머금은 오리의 변이 낙숫물에 고인다 급성으로 토양을 빨아들인다 오염된 물줄기가 전파돼 뻗어나간다 꽥꽥, 감염되지 않은 오리들은 먹이통 주변으로 모인다 원을 그린다 에워싸는 검은 관중들 그림자가 비대해진다 결속력을 갖는다 반대편엔 변이돼 쓰러진 오리의 대가리가 이명을 앓는다 뚜렷해지는 건 서로를 벗어나지 못하는 눈빛과 어디까지가 통증인지 죽음인지 알 수 없는 꽥꽥, 무게 중심이 앞으로 휘청거린다 번개가 지나가는 새를 관통할 때 날지 못하는 이유조차 가늠할 수 없는 태도 꽥꽥, 깃에 묻은배설물이 다른 오리의 깃으로 옮겨 붙는다 오류를 감지한 듯 날개를 버둥거린다 살고 싶다면 착지 기술부터 먼저 익혀야 한다 구덩이가 증폭된다 문이 열리고 방호복을 입은 사람들이 포획하지 않고 주워 담는다 꽥꽥, 오리와 사람의 발 무늬가 겹친다 밀려나는 토양 갈퀴 자국이 난파된 이파리처럼 번진다 모두가 밀실을 빠져나가고 방명록만 남는다 남겨진 깃털들 꽥꽥, 젖은 울음소리가 축사 주위를 계속해서 떠돈다

 

* 컴퓨터의 프로그램이나 시스템의 착오

 

 


 

 

김미소 시인 / 운동화의 기분

 

 

매듭은 자주 풀린다

고개를 숙이면 그늘로 모아지는 공손한 두 발

안구가 결말처럼 쏟아지는 기분,

집중의 자세로 끈을 묶는다

리본의 방식을 말할까

오른발과 왼발은 서로 바깥쪽을

끝내 볼 수 없으니 그렇게라도 함께하면

덜 외로워지는 걸까

한쪽만 흘러내리는 양말의 기분,

소매를 당겨 아토피를 감추면

덜 부끄러워지는 기분,

기분을 드러내고 싶을 땐 매듭이 풀린다

목적지가 기억나지 않으면

지문을 포개고 소요(逍遙)한다

휠체어에 앉은 여자가 지나간다

가지런한 두발

보호색이 있다면 흰색을 말할까

눈부신 백색, 붕대일까 가면일까

오늘의 날씨가 집중호우라면

습한 상상만을 신고 다니겠지

이런 날은 젖거나 젖지 않거나,

창밖을 바라만 보거나 창을 뛰어넘거나,

의도적으로 우산은 잊고 운동화를 신었겠지

맨발만 알고 있는 안감의 촉감

휠체어를 밀고 가는 남자의 닳아진 밑창 같은 것,

그러나 아름다웠다고 저 풍경이 끝내 말하면

두 발은 어떤 기분일까

 

 


 

김미소 시인

1989년 서산 출생. 순천대 문예창작학과 졸업. 2019년 제8회 『시인수첩』 신인상 등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