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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시인과 시(현대)

이승리 시인 / 무인도에서의 습진 외 4편

by 파스칼바이런 2021. 10. 13.

이승리 시인 / 무인도에서의 습진

 

 

고립된 새벽,

손바닥의 살갗이 가렵다, 가려운 뒤에야

살갗은 살갗의 촉감이 가렵다, 는 것을 안다

지금껏 손은 자신의 표피가 아닌

외부의 것들의 접촉에 의해서만 느낌을 취했다

가끔은 누군가가 이처럼 나를 취해

느낌을 갖는 일에 두려워하기도 하고

마주치며 내가 나에게 취해져 있다는

사실에 의문을 표명하기도 한다 마치, 스스로가

서로 가해자가 되고 악역으로 살아온 것처럼

가려운 나를 득득 긁어버린다

 

다시 고립된 새벽,

손바닥의 살갗이 쓰라리다, 쓰라린 뒤에야

살갗은 살갗의 촉감이 쓰라리다, 는 것을 안다

이렇게 부스러기로 남은 기억을 벗겨낼 때에는

책임 같은 부작용이 수반된다는 사실을

뒤늦게 발견한다 그 순간, 나로

버려진 짓무른 내 늙음을 상상한다, 피가 스며

신음하는 허물을 덮어준다, 벗겨진

자리에는 이미 덧입혀진 내가 있다 아,

나는 완벽한 동성애를 함으로써 존재하는 것이다

 

 


 

 

이승리 시인 / 반 지하 방

 

 

이곳은 1층도 아니고 완전한 지하도 아니다

그렇지만 1층일 수도 있고 지하일 수도 있다

일반적으로 반은 1층이고 반은 지하이다

하지만 누구도 반 1층 집이라고 부르지

않는 것을 보면

이곳은 반 지하 방이다

반 지하로부터 시작된 1층, 2층은

사실 반 2층, 반 3층 인 것이다.

그러나 누구도 반 2층, 반 3층이라고 부르지

않는 것을 보면

저곳은 1층 집이다

반 2층은 그냥 1층이고

반 1층은 그냥 지층인 것이다, 아니

지하인 것이다. 집이 될 수 없는 영원한

방.

 

빛과 어둠은

사실 반 빛 반 어둠이다

그러나 누구도 반 빛이라고 부르지

않는 것을 보면

이곳은 어둠의 방이다

반 빛은 그냥 어둠이고

반 어둠도 그냥 어둠인 것이다

 

그래서 난

빛과 어둠의 확실한 貰入

그 속에서

늘 위태롭다

늘 어지럽다

 

 


 

 

이승리 시인 / 부산에서

 

 

여기서 살아 돌아갈 수 있을까

아니, 돌아간다 한들 살아갈 수 있을까

 

부산이 종착역이라지만

내 무덤이라 생각해본 적은 없다

 

이를테면 내가 생각하는 무덤은

조그만 市에 장례식장 딸린

2차 병원이다

 

작년 여름,

대구 토박이 지훈이는

경북 대학교 병원에서 죽었다.

만 27세의 나이로

 

그러니까

광명시에 사는 내가

죽게 될 자리는 결국

광명성애병원 아닐까

하는 생각.

 

여기서 살아 돌아갈 수 있을까

아니, 돌아간다 한들 살아갈 수 있을까

 

이 말은 돌아갈 곳을 생각하며 살아간다는 말인데

돌아가고 나면 또 어디를 생각하며 살아가야 한다는 말인가

 

텔레비전 속 기상 캐스터가

차분히 호우경보를 발령한다

 

나는 문득 생각해본다

 

서울에 두고 온

잠수교는

매번 세례를 받는데

술에 잠긴 아버지는

언제쯤 거듭날 수 있을까

 

아, 돌이켜보면

무엇하나 개척한 것이 없다

 

애초에 나란 존재는

어머니가 나를 버리기 훨씬 이전부터

 

불모였을지 모른다

 

 


 

 

이승리 시인 / 오렌지

 

 

오렌지를 사등분하고, 그 속의 육질을 모두 꺼내 먹으면, 네 척의

거룻배가 띄워진다 이것은 찢겨진 이래 가장 강한 비와 바람에도

견뎌낸 껍질이다 그러나, 처음부터 이 배에는 노가 없었다 설령, 또다시

우리가 육질에 젖어 우리의 죄악만한 비와 바람을 몰고 온다 해도. 언제나

우리에게 필요한 건 거룻배의 외양이 아닌 뗏목의 긴박한 구원에 있었다

 

 


 

 

이승리 시인 / 천사는 유부녀였다

 

 

평소에 나는

천사의 존재를 믿었지만

그 신앙의 바탕에는

천사가

中性 혹은

無性이라는

인식에서 비롯된 것이었다.

 

짐작하건대, 오늘

천사는 유부녀가 될 수도

있다는 것을 알아챘다

 

그러나 엄밀히 말하면

천사가 유부녀인 것이 아니라

천사가 지닌 날개가

유부녀였다

 

바람이 일어도

동할 수 없는

유부녀 말이다

 

그러므로

평소에 나는

천사의 존재는 믿었지만

날개는 믿지 않았었다

 

하지만 사실 그것은

바람이 일어도

임의로 퍼덕일 수 없는

심장을 지닌 것뿐.

 

따라서

우리는 포옹하지 못했다.

 

나는 그저 보호 받았고.

 

태초에 잃어버린 그

갈빗대가 살아 움직이는 것을

 

처음으로 목격한 남자가 되었다.

 

날개를 접고 유유히 부유하던

역행의 동작을

 

으레 사랑한 셈이다-

 

 


 

이승리 시인

1981년 서울 출생. 서울신학교 신학과 졸업. 2011년 《문학과 의식》에 시를 발표하며 등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