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이나 시인 / 구름 새
새 눈 속의 구름이 마법 양탄자다
바람을 타고 바닷길을 비행한다 온몸에 찍힌 구름지문,
세상의 아름다움을 처음 발견한 듯이 순간의 구름, 저인 것을 아는 듯이
라아날, 자탄양!
출렁이는 물결 위 높이 멀리 새 눈 속의 구름이 되고 싶어서
나도 주문을 외워 구름의 양탄자를 탄다
신밧드의 모험이다
한이나 시인 / 산국차를 마시며
서릿발 꽃 핀, 산국 저 혼자 들판을 만든다 뜨겁게 뜨겁게 피어난 아픔 마음 속 슬픈 소리가 나는 꽃, 마른 입술에서 태어나는 노란 향기 시린 뼛속까지 환해지는 그윽한 향기의 소리 별의 물소리.
한이나 시인 / 팔만대장경
마음 ‘심’자 한자 위에 떠있는 팔만대장경이 마음을 들어내자 가볍게 사라진다 행방이 묘연하다 울타리 밖에서 서성이던 팔만 지옥의 근심이 기다렸다는 듯 곧장 달겨드는, 백지 한 장의, 있는 것이 곧 없는 것이고 없는 것이 곧 있는 것인, 내게 무슨 일이 일어나기나 했던가 아무 일도 없는 듯 하루가 이틀이 한 달이 무심히 건너간다 까맣게 꿈을 잊고 있다가 보면 뜬금없이 우주 저쪽에서 모르스 부호가 울릴지도 모르지 마음 ‘심’자 한자 위에 다시 세운 팔만대장경이 기우뚱 오후 두 시로 기울어져 있다
한이나 시인 / 대꽃
대는 속이 비어서 제 속에 바람을 지니고 산다 왕죽이 울창하게 들어앉은 단속사 대밭 시퍼렇게 멍든 몸으로 곧게 생을 떠받치고 서있는 힘 속내를 앓다가 다 비운 자리에 그만큼의 소슬한 바람으로 채운다 있고 없음이 하나다 내가 바로 너다 내 몸 안으로 대 끝에 걸려있던 해가 쑤욱! 들어온다
열달 후 대꽃이 일제히 필 때를 기다린다
한이나 시인 / 겨울강
저 강의 쪼개짐이 정선 길 같다 쩡, 쩡, 쩡, 큰 울음이 얼음 한 복판에 꾸불길을 낸다 느린 세마치 장단을 늘였다 줄였다, 정선 아라리 길 길게 풀려 나간다 얼음장 밑으로 밑으로 물소리 삶의 막장 기진하여 애터지는 소리 겨울강이 울며 정선 길 간다
한이나 시인 / 밀경(密經)
방사의 현장 인도 카주라호의 섹스나무는 남근의 귀두를 닮은 연둣빛 열매다 일제히 뜨거운 시선이 닿자 열매 하나 한순간 툭! 떨어져 하늘 높이 세워진 사원 벽의 조각 미투 나상에 후배위로 서 있다 마악 밀경密經에 들어 깨달음을 얻고 있다
흰 꽃이 넓은 마당 가득 쟈스민 향기로 피어났다
한이나 시인 / 귀여리 마을에 와서
나 어둠이 물드는 귀여리 마을에 와서 어둠을 한 입 베어 물다 일몰이 가장 아름다운 때를 기다려 조용한 슬픔으로 넘치는 강물 몸 허물고 지는 해의 알 태 안에 품어 탄생을 기다리는, 너와 나의 나무 그리고 꽃과 새의 집 동판을 깎고 문지르고 흠을 골라내어 알을 키우기에 알맞은 향기의 집을 지으리
나 귀 여리고 여려 잘 곧이듣던 잘 속아 넘어가던 사는 일, 정면이 아닌 그저 비껴가기만 하던, 이제 그냥 바람으로 떠돌리 한 줄기 바람에 날개 달아 머언 저 밖을 날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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