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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시인과 시(현대)

한이나 시인 / 구름 새 외 6편

by 파스칼바이런 2021. 10. 15.

한이나 시인 / 구름 새

 

 

새 눈 속의 구름이 마법 양탄자다

 

바람을 타고 바닷길을 비행한다

온몸에 찍힌 구름지문,

 

세상의 아름다움을 처음 발견한 듯이

순간의 구름, 저인 것을 아는 듯이

 

라아날, 자탄양!

 

출렁이는 물결 위 높이 멀리

새 눈 속의 구름이 되고 싶어서

 

나도 주문을 외워 구름의 양탄자를 탄다

 

신밧드의 모험이다

 

 


 

 

한이나 시인 / 산국차를 마시며

 

 

서릿발 꽃 핀, 산국

저 혼자 들판을 만든다

뜨겁게 뜨겁게 피어난 아픔

마음 속

슬픈 소리가 나는 꽃,

마른 입술에서 태어나는

노란 향기

시린 뼛속까지 환해지는 그윽한 향기의 소리

별의 물소리.

 

 


 

 

한이나 시인 / 팔만대장경

 

 

마음 ‘심’자 한자 위에 떠있는 팔만대장경이 마음을 들어내자 가볍게 사라진다 행방이 묘연하다 울타리 밖에서 서성이던 팔만 지옥의 근심이 기다렸다는 듯 곧장 달겨드는, 백지 한 장의, 있는 것이 곧 없는 것이고 없는 것이 곧 있는 것인, 내게 무슨 일이 일어나기나 했던가 아무 일도 없는 듯 하루가 이틀이 한 달이 무심히 건너간다 까맣게 꿈을 잊고 있다가 보면 뜬금없이 우주 저쪽에서 모르스  부호가 울릴지도 모르지 마음 ‘심’자 한자 위에 다시 세운 팔만대장경이 기우뚱 오후 두 시로 기울어져 있다

 

 


 

 

한이나 시인 / 대꽃

 

 

대는 속이 비어서 제 속에

바람을 지니고 산다

왕죽이 울창하게 들어앉은

단속사 대밭

시퍼렇게 멍든 몸으로

곧게 생을 떠받치고 서있는 힘

속내를 앓다가 다 비운 자리에

그만큼의 소슬한 바람으로 채운다

있고 없음이 하나다

내가 바로 너다

내 몸 안으로 대 끝에 걸려있던 해가

쑤욱! 들어온다

 

열달 후 대꽃이 일제히 필 때를 기다린다

 

 


 

 

한이나 시인 / 겨울강

 

 

저 강의 쪼개짐이 정선 길 같다

쩡, 쩡, 쩡, 큰 울음이

얼음 한 복판에 꾸불길을 낸다

느린 세마치 장단을 늘였다 줄였다,

정선 아라리 길 길게 풀려 나간다

얼음장 밑으로 밑으로 물소리

삶의 막장 기진하여 애터지는 소리

겨울강이 울며 정선 길 간다

 

 


 

 

한이나 시인 / 밀경(密經)

 

 

방사의 현장 인도 카주라호의 섹스나무는 남근의 귀두를

닮은 연둣빛 열매다 일제히 뜨거운 시선이 닿자 열매 하나

한순간 툭! 떨어져 하늘 높이 세워진 사원 벽의 조각 미투

나상에 후배위로 서 있다 마악 밀경密經에 들어 깨달음을

얻고 있다

 

흰 꽃이 넓은 마당 가득 쟈스민 향기로 피어났다

 

 


 

 

한이나 시인 / 귀여리 마을에 와서

 

 

나 어둠이 물드는 귀여리 마을에 와서

어둠을 한 입 베어 물다

일몰이 가장 아름다운 때를 기다려

조용한 슬픔으로 넘치는 강물

몸 허물고 지는 해의 알 태 안에 품어

탄생을 기다리는,

너와 나의

나무 그리고 꽃과 새의 집

동판을 깎고 문지르고 흠을 골라내어

알을 키우기에 알맞은 향기의 집을 지으리

 

나 귀 여리고 여려

잘 곧이듣던 잘 속아 넘어가던

사는 일, 정면이 아닌 그저 비껴가기만 하던,

이제 그냥 바람으로 떠돌리 한 줄기

바람에 날개 달아 머언 저 밖을 날리

 

 


 

한이나 시인

1951년 충북 청주에서 출생. 청주교육대학 졸업. 1994년 《현대시학》을 통해 등단. 시집으로 『가끔은 조율이 필요하다』, 『귀여리 시집』, 『능엄경 밖으로 사흘 가출』, 『유리 자화상』,등이 있음. 한국시문학상, 서울 문예상 대상, 내륙문학상 수상. 2020 대한민국시인상 대상, 2020 영축문학상, 2016 세종도서나눔 선정. 현재 한국시인협회, 한국문인협회, 가톨릭문인협회 회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