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 시인과 시(현대)

손종수 시인 / 고흐 외 2편

by 파스칼바이런 2021. 10. 18.

손종수 시인 / 고흐

 

 

 푸른 녹과 주홍의 꽃은 지독한 모멸의 상징이지

 살아 꼭 한 점의 그림을 팔았대

 거칠고 붉은 터치와 가장 높은 음의 노란색으로 부식된 얼굴, 문화역 서울284 낡은 벽돌 건물에 기댄 남자

 청동 이끼의 눈썹 아래 절망까지 삼켜버린 깊은 눈이 손짓하고 있었어

 거부할 수 없었지

 감자 먹는 사람들을 보면서 이름을 가만히 불러봤어

 어쩐지 그 안에 당신 있을 것 같아서

 해바라기, 사이프러스 춤추는 아를의 풍경  속으로 걸어들어가 황홀한 소용돌이의 태양과 밤의 카페와 별빛이 흐르는 강물 바라보았네

 귀를 자르고 하얀 광기로 칭칭 동여맨 남자의 바스러질 듯 금이 간 목소리가 보여

 너희도 알게 되리라, 안이 지극한 쓸쓸함을,

 생 레미의 병상을 떠나 까마귀 나는 오베르의 밀밭에서 스스로 가장 높은 음의 노란색이 돼버린 남자

 세상에는 여전히 많은 고흐가 산다

 

손종수, 「밥이 예수다」, 북인

 

 


 

 

손종수 시인 / 권태, 이상, 바둑

 

 

어떤 시인은 ‘비의 한복판에서도 마른 독백을 한다’*는데

그는 그 안에서 바둑판과 흑과 백의 돌을 꺼낸다.

 

바둑은 참 이상하다.

 

이상의 연애편지를 보고나서야

누군가를 만나는 일이 맛나다는 것을 알았으니

그는 참 늦은 사람이라고,

바둑판 위의 그것이 꽃인지 별인지 생각하는 것이다.

 

우주요, 별이라 넓혀놓고

다시 화점(花點)이라니 이상하지 않은가.

 

시인이 사막을 찾으러 누군가를 건너든 말든

이상이 연애편지를 맛나기 위해 후루사토를 쓰든 말든

그는 포기하였던 아침밥을 맛나기로 한다.

 

이것은 정석의 변화일까, 신수일까.

 

* 황종권 시인, 최정희에게 보낸 이상의 연애편지에서.

 

 


 

 

손종수 시인 / 반전

 

 

할인매장에서 구두 한 켤레 샀어

신자마자 발뒤꿈치 발가락 발등까지

일제히 전해오는 부적응의 아우성

새것은 헌것을 억누르려 하고

헌것은 새것을 길들이려 하지만

삶이란 언제나 싸우며 정분나는 일

신축성 좋으니까 곧 편해질 거예요

행여 마음 바꿀까 상냥하게 웃는 점원

쇼핑백 얼른 안겨주고 신용카드 빼앗아가네

오랜 시간 그런 줄 알고 살아왔는데

발톱 깎다 보았지 짓눌려 굳은 새끼발가락

이런, 편해진 건 발이 아니라 구두였잖아

 

 


 

손종수 시인

1958년 서울출생. 1986년 서울시립대 중퇴. 2014년 계간 《시와 경계》 등단. 2017년 첫 시집 『밥이 예수다』 출간, 2017년 대한바둑협회 스포츠공정위 위원장. 세종도서 문학나눔 선정. 2019년 두 번째 시집 『엄마 반가사유상』 출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