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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시인과 시(현대)

이정원 시인 / 흐르는 여백 외 7편

by 파스칼바이런 2021. 10. 18.

이정원 시인 / 흐르는 여백

 

 

징검돌 위에 눈 내립니다

돌들이 조금씩 자라납니다

하얀꽃 벙글어 탐스럽습니다

 

개울바닥이 검은 이끼 달라붙어 있습니다.

이끼를 덮고 흐르는 냇물도 검습니다

검은 냇물이 눈을 받아 감키며 쉬지 않고 흐르는 밤

꽃잎은 밤새도록 부풀어 겹꽃이 됩니다

 

흐르는 냇물이 흰 돌꽃에게 검은 여백이 되어줍니다

여백이 검기도 하다는 걸 알았지요

여백이 되려고 냇물은

밤새도록 눈물을 삼키며 흐르고 있었나 봅니다

 

흐른다는 건

누군가에게

잔잔한 여백이 되는 것입니다

 

 


 

 

이정원 시인 / 쑥

 

 

쑥을 뜯는다

쑥잎이 향기를 내지른다 코를 찌른다

향기도 쌓이면 이렇듯 지독해진다

 

손가락에 검푸른 쑥물이 밴다

박박 문질러도 지워지지 않는다

등뼈가 부러질 때 내뿜은 내 골수였구나

곁까지 뻗을 때 쌓인 어혈이었구나

제 어혈로 남의 어혈을 뽑아 다스린다니

그만하면 이름값 톡톡히 하는 셈

 

소쿠리 속에 손을 넣으니

쑥들이 열에 들떠 뜨끈뜨끈하다

세상 밖으로 내민 고개 사정없이 꺾일 때

열 받아 토해낸 울화였구나

제 열로 남의 오한을 쑥! 뽑아 다스린다니

이름이 쑥,인게 당연하다

 

 


 

 

이정원 시인 / 꼬리에 꼬리를 물고

 

 

꼬리가 사라졌다

치렁치렁하던 이다*의 꼬리는 어디로 갔나

 

꼬리의 행방에 관하여 떠도는

무성한 소문을 알고 있다

 

더러는 세상 모든 요설을 수집하다

목구멍 속으로 말려들어가기도 하고

더러는 서로를 탐색하다가

능구렁이처럼 가슴 속에 똬리를 틀었다고도 하지

엉덩머리로 꼬리치다

눈꼬리에 들러붙어 눈웃음의 주범이 되었다고도 하네

당신이 내뱉으려다 슬쩍 삼켜버린 말

꽉 깨문 어금니사이에서 꼬리를 사리고 있는지도 몰라

 

분명한 건 꼬리가 짧아질수록

꼬리의 기능이 몸 안 어딘가로 차곡차곡 스며들었다는 것

꼬리 감추는 방법을 터득할수록

인간은 점점 완벽한 영장류가 되어 왔다는 것

種의 진화는

꼬리에 꼬리를 물고 따라온

꼬리의 변천사일지도 몰라

 

감춘 꼬리의 습성이 갑자기 튀어나올 것 같아

슬그머니 꼬리뼈에 손이 간다

꼬리가 눌러 붙었던 흔적, 도돌도돌 만져진다

(꼬리치고 싶다)

 

그리운 꼬리,

먼 고향처럼 아득한 원시의

유적

 

* 이다 : 2009년 5월 19일 뉴욕 자연사 박물관에서 공개된 인간과 유인원의 조상으로 추정되는 4700만년 전 화석. 긴 꼬리를 가지고 있다.

 

 


 

 

이정원 시인 / 바람의 형식

 

 

바람의 탁본을 뜨면 여러 겹

표정이 다른 무늬의 층이 찍힐 것이다

 

바람의 역할이란

꽃술을 열기도 꽃잎 떨어뜨리기도

내 몸속 지나며 휘파람 문신 뼈에 새기기도 하지만

십칠 층 곡대기로 찾아와 밤새 울고 간 적도 있다

 

그 울음에 귀 막고 덧문 꽉 닫아걸었더니

숨어서 입술 깨물고 있었나 보다

 

지난 계절

먹구름의 더께 옷 걸치고 몰려와

아름드리 거목들 우람한 세월을 냉큼 주저앉혔다

 

견고한 둥치 베어지고

남은 건 뿌리 깊은 의자다, 바람의 앉음새다

 

우두커니 누군가 기다려 온

오래된 습성의 의자는

바람이 은유한 동그란 문자, 휴지부의 표상이다

 

내게도 바람의 속성 있다

끊임없이 두드리고 부러뜨리고 휘몰아치다가

흉곽 깊숙이 의자를 앉히고 쉬어 보기도 하는데

 

바람의 전모가 궁금하다

 

모호한 형식의

지금은 없는 바람

 

 


 

 

이정원 시인 / 실종

 

 

왜 안 보이는 거야 어제까지 앉아있던 소슬한 집 한 채,

갈대숲에 깃들어 수상가옥처럼 아찔했지만 까르르 웃음기 번져나던 오두막,

왜 사라진 거야

 

이소(離巢)할 새도 없이

 

누가 거두어간 거야 개개비 둥지 속 젖니 같던 배냇짓

 

흙탕물의 긴 혓바닥 사정없이 숲을 핥고 있는데 무릎 꺾인 갈대들

끌려가지 않으려 갯바닥 붙들고 늘어지는데

 

둥지가 있던 주위를 돌고 돌다 갈대꽃 끄트머리에 몸을 부린 어미개개비,

망연히 먼 숲 바라보다 부리 떨구는데 젖은 깃털 우주처럼 무거운데

 

개개비 실종신고는 개개개 비비비, 자지러지는 울음 뿐

 

허공에 길 내는 법 일러주지 못해 제 가슴 쪼고 있는 거야

 

누가 서둘러 저 수상한 폭풍우 갈피 샅샅이 뒤져봐야 되지 않겠어?

 

 


 

 

이정원 시인 / 음 소거, 이후

 

 

이봐요,

빗소리

 

누굴 두드려 패고 싶을 땐 어떻게 하나요, 흠씬 울고 싶을 때는요

 

옥상은 소리를

꿀꺽 삼켜요

 

너무 높은 공중에서 착지를 서두른 건 누구의 탓도 아니죠

 

바람 아니면

그렇게 악다구니를 쳐 대도 천지가 고요해

어제 실려 나간 죽음에도 깜깜했듯

 

반응 없는 아파트 옥상 바닥을 꽝꽝 두드리다 그냥 울죠

 

유리창이 글썽이는 건

항우울제로 별을 주워 삼켰기 때문인가요

 

옷장 서랍에서 별들은 숨을 죽여요

 

바닥은 바닥일 때만 소리를 지르죠

바닥이 천장이 되거나 너무 높을 땐 소리를 숨기는 법

 

적막은 때로 암담한 짐승이죠 내 쓸개를 조목조목 파먹어요

 

이봐요, 빗소리

그냥 부서지기만 할 건가요

소리를 종량제 봉투에 담으면 빵빵하게 부풀어 날아오를 텐데

어느 순간 공중에서 터져버릴 텐데

 

소리를 삼킨 눈동자가 부옇게 흐려요

울상을 한 하루가 낮은 처마 끝에서 주르륵 미끄럼을 타네요

바닥을 치려는 거죠

 

발목을 분지르는 自害의 뒤끝

장렬해요

 

 


 

 

이정원 시인 / 깃털에 대한 명상

 

 

깃털을 주웠죠

깃털을 주웠을 뿐인데 새가슴이 되었죠 이건 누구의 코사지일까

인디언 추장처럼 머리에 꽂으면 안 될까

 

깃털은 인디고블루로 빛나

저녁을 데리고 어디 먼 시베리아로 가는 여정처럼 조금 들뜨기도 했죠

 

깃털을 주웠죠

높바람에 떠밀려온 천 조각 같은 여리디여린 발가락을 보았죠 분홍의

페디큐어를 싣고 온 새의 가련한 생이 보였죠

 

첨단은 때로 위태로워

마법의 양탄자도 실은 한 올 한 올 첨단의 교직이라니

나는 깃털 같은 하루를 내 흉강에 꽂고

촘촘한 밀도의 체위를 극지까지 몰아가리라

위태로운 상상에 몰두할 뿐이죠

찌라시 같은 소문은 금세 피뢰침에 낚이겠지만

파문은 낙뢰처럼 파다하겠죠

 

깃털을 주웠죠

어느 생에선가 내가 잃어버린 비늘 한 조각이 이 저녁을 견인하죠

바람은 북북서로 달아나는데 몸통 잃어버린 깃털 너무 소슬해

나는 깃펜으로나 쓰려 하죠

 

화려한 솜씨로 공중에서 낚아챈 송골매의 사냥감 같은

명편 하나 낚을 수 있을까 하고

 

 


 

 

이정원 시인 / 미각(微刻)

 

 

쌀 한 톨에

반야심경을 새겼다는 건

쌀알에 들어 한 시절 침식을 잊고 뒹굴었다는 것

 

그 내부에 구멍 내고 들어앉아

쌀벌레처럼 쌀이 들이켠 물과 공기와 햇빛을  양껏 마셨다는 것

 

쌀 속에 온 몸 감추고

진신사리 하나 불쑥 내놓듯

어느 날 그*가 쌀 한 톨 세상에 내놓았을 때

그건 쌀알이 아니라 가없는 허공이었다

글자들이 쌀벌레처럼 낱낱이 기어 나와 꽉 차는 허공

 

미음(微音)을 보고

미시(微視)를 듣고

먼지의 먼지가 되었다

티끌 속에 든 굴신의 세월

쌀이 아닌 자신을 깎아 깨친

색불이공 공불이색

 

나는 좀체 누구의 내부에 든 적 없어

한 글자도 새겨 남기지 못하는 거라

 

쌀만 축내는 내 입속을

맴도는 심경(心經)이여

 

*김대환: 1933~2004. 세계적 타악기 연주가이며 세서미각(細書微刻)의 명인. 쌀 한 톨에 <반야심경> 283자(이름 포함)를 새겨 1990년 기네스북에 등재됨.

 

 


 

이정원 시인

경기도 이천에서 출생. 인천교육대학 졸업. 2005년 계간 《시작》으로 등단. 2009년 문예진흥기금과 경기도 창작지원금 수혜. 시집으로 『내 영혼 21그램』(천년의시작, 2009)이 있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