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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시인과 시(현대)

이서화 시인 / 전생과 놀다 외 4편

by 파스칼바이런 2021. 10. 18.

이서화 시인 / 전생과 놀다

 

 

송정암 절 마당엔

봄햇살이 개털처럼 날린다

벚꽃도 아지랑이도 개털과 한 계절로

따뜻한데, 털갈이 중인 개 한 마리

어디서 물고 온 것인지 장갑 한 짝 물어뜯고 있다

공중이 못마땅한 듯

물고 있던 장갑을 던지며

주먹을 먹이고 있다

개는 나무 밑을 맴돌다 다시 마당으로

어쩌면 전생의 인연이 생각난 듯

또 측은한 듯

왼쪽 손 하나 핥고 있다

그래서 네 개의 발을 받았을까

사람의 말, 몇 마디만 알아들어도 칭찬받는

귀를 가지고 있다

개와 발은 서로 생각나고 또

생각나지 않을 때까지 논다

절마당 귀퉁이에서

네 발을 정성스럽게 핥는 개

전생이 가끔 생각나는 듯

두 귀가 산문 쪽에서 골똘하다

 

이서화 시집 『낮달이 허락도 없이』(2020/천년의시작) 중에서

 

 


 

 

이서화 시인 / 황태 날다

 

 

아가미를 벌리고 큰 추위들이

황태 덕장으로 실려와

겨울을 지날 때까지 온몸이 노릇하게 말라간다

내장을 비운 배 속엔 한파 특보가 가득 들어있다

추위를 먹고도 한 철을 날 수 있다는 경지

틈만 나면 뜨끈한 국물을 속에 넣기 바쁘고

그것도 모자라 한증막 열기에 몸 바깥을 데우는 사람들

크게 입 벌리고 이 겨울,

추위란 추위 모두 먹어버리겠다는

어느 지경에 이르러서 온몸 비린내 다 버리고

옅은 금빛 황태가 되겠다는 작심이 꾸덕꾸덕하다

 

깊은 산속을 찾아가던 바람과

준령을 넘어온 푸른 파도 소리가 맛으로 드는 황태

일렬종대의 덕장 사이로 지나가는 골바람, 차가운 햇빛

어느 투박한 뚝배기를 만나

쓰린 속 풀어줄 한 그릇 맛 보시報施가 녹았다 얼었다 한다

 

밤사이 또 눈이 내리고

아가미 가득 푸른 허공을 물고 눈을 부릅뜨고 있다

누군들 저 푸른 허공 한 그릇 배 속에 넣고

시원하게 속 풀어지지 않겠는가

 

겨울 내내 눈 한번 감지 않는 황태

더 이상 꼬리로는 살지 않겠다는 듯

말라비틀어진 후미 쪽으로 똑똑 물방울들이 떨어지고 있다

하늘을 향해 입 벌리고

겨울 햇살 쪽으로 온몸 뒤틀며 날아오르고 있다

 

 


 

 

이서화 시인 / 탑

 

 

오대산 염불암 너와집에서

잘 마른 탑을 만났다

탑은 깊은 우물을 끓이는 중이었다

한두 그루쯤 나무를 베고 쪼개고

가지런히 우물 井으로 쌓아 놓은

저 장작더미는 얼마나 따듯한 탑인가

 

속세의 아랫목이란 모두

탑이 있던 장소가 아닐까

염불암, 당간지주도 기와 불사도 버리고

속세의 누추한 지붕과 아랫복 빌려와

기우는 만행(蠻行)이 비로소

만행(卍行)에 이르러 있다

 

높은 곳으로의 탑의 영험을 친다면

저 장작 탑에서 뿜어져 나온 저 연기란

또 얼마나 높은 탑인가

우물 井으로 쌓은 저 탑으로

우물 끓이고 공양을 끓인다

 

한곳에 오래 정좌하고 있으면 모두 탑을 닮아간다

새벽에 탑이 느릿하게 일어나서

이부자리를 개고 또 한참 동안 탑이 되었다가

몇백 년이 흐른 다음

느린 걸음걸이로 부엌으로 나가

손등에 물 맞춘 밥을 지을 것이다

산골짜기 방 한 칸 덥히는 일은

탑 하나 허무는 일이라는 듯

 

 


 

 

이서화 시인 / 둥근 방

 

 

양파는 늦가을부터 초여름까지

여러 겹 나이를 한꺼번에 먹는다

알뿌리들은 뿌리를 묶고

줄기로 바람을 불어넣는다

 

겨울 동안 온갖 바람을 다 들여놓고

부풀어진다고 생각했었다

양파를 까고 칼로 반을 자른 양파 속에는

눈물을 쏙 빼게 하는 질책이 들어있다

눈물을 직감하는 일들처럼

어떤 양파 앞에서는 저렇게 여러 겹으로

웅크린 채 울어본 적이 있다

그런데도 내가 둥글어지지 못한 이유는

매듭지을 뿌리도 바람을 불어넣을

긴 싹이 없었기 때문이다

겉부터 속까지

여기저기 울긋불긋 마음 쓸 겨를이 없다

그냥 사납게 매워지자고

웅크리고 울었던 기억밖에 없다

 

울지 않아야 둥글어진다

 

 


 

 

이서화 시인 / 스위치백

 

 

대부분의 간이역들은

덜컹거리는 잠 속에 있다

 

심포리역을 지나며 안내방송을 듣는다.

‘잠시 후 스위치백 구간입니다 4분정도 소요될 예정입니다’

통리 협곡을 지나 흥전역과 나한정역 사이

누구나 지나온 길과 조우할 수 있는 구간이 있다

 

잠에서 깬 몇몇의 승객들 어리둥절한 풍경

차창 밖엔 성의 없이 다가온 가을과

잠결에 놓친 과거가 구불구불 나타나고 길이 되감기고 있다

무슨 재주로 지나 온 길의 뒤편으로 갈 수 있나

지나왔던 시간만큼

뒤로 가는 시간도 구불거린다

 

시간을 끌고 열차는 다시 순방향으로 달린다.

두고 온 어느 즈음에 탄력의 힘이 있다는 것

그 놓친 힘을 다시 찾을 수 있다는 희망 같은 것이 있는

알파벳 Z자 모양으로 올라가거나 내려가는

스위치백 구간

기차가 지나가면 시간은 다시 닫히고 만다.

 

덜컹거리는 잠에 빠져 있던 차창 밖에 있는 전생을

잠 깨서 신기한 듯 바라본다

접어 두었던 날들을 펴면

저 언덕 쉬지 않고 올라가려고만 했었다

 

꽃은 아래쪽에서 위로 피고

저 위에서부터 후진으로 내려오는 단풍

오르내림의 발원이 곧 지금이겠지

 

지상에서 숨을 고른 후

다시 꽃의 계절로 올라갈 계절이 붉다

 

 


 

이서화 시인

1960년 강원도 영월에서 출생. 상지영서대학 문예창작과 졸업. 2008년 《詩로 여는 세상》을 통해 등단. *시집『굴절을 읽다』.「낮달이 허락도 없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