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가을 시인 / 욕의 칼
몸에 욕이 자라요 나물처럼 쑥쑥 자랐어요
강하고 독하게 자랐어요 아버지 부드러운 혀는 독보다 피보다 진해요 눈빛보다 강한 무기, 힘세고 강하게 살아남죠 무엇이든 욕으로 견디고 마음을 찌르는 칼 e 씨발의 도시 미친 욕을 하거나 욕을 먹거나 밥 한술에도 욕을 얹고 아이들도 욕을 하고 욕을 부르는 전염
욕을 하지 않으면 하루도 숨 쉴 수 없는 세상 누가 만들었나요
나쁜 아버지, 욕하지 마세요 착한 당신, 욕에 물들지 마세요
영혼을 죽인 살인언어 당신이 내게 먹여준 욕 먹고 자란 나를 보세요 욕하고 싶은가요? 욕으로 싸우는 세상 아버지의 아버지, 또 아버지에게서 욕을 배웠나요
누가 욕하나요 당신도 나도 아픈 욕 내려놓으세요
사랑한다고 말하세요 욕을 이기는 법, 욕보다 강한 사랑은 없나요 나쁜 당신, 쉿! 욕하지 마세요
이가을 시집 『슈퍼로 간 늑대들』(2015/책 만드는 집) 중에서
이가을 시인 / 겨울아이
때로는 생의 무게 내려놓고 편해졌으면 해봐도 더 버둥거릴 12월 열 이튿날 오동잎 하나 등뼈 드러난 몸 웅크리고 그렁 그르렁 앓는 소리하며 길바닥을 떠돈다
기쁨의 환호성 하던 그 해의 기억이 이젠
숨 못 쉬게 옥죄어 오는 고통으로 몸집 불리며 자라고 있다 어렴풋할 이름자 위에 새로이 아로새긴 또 하나 세월이 흘러도 눈곱만큼도 퇴색되지 않을
보내기 싫은 까닭에 하 그리워 놓지 않을 마음으로 시시각각 야위어가는 가슴에 꽝꽝 못질한 채 다시 혈관 속을 떠돌고 있다
그래서일까 그의 눈은 늘 젖어 있다 이물감 없이도 파르르 경련을 일으키고 감기지 않는 눈으로 찾고 또 찾느라 두리번거리는 두 눈엔 소금조각까지 키우는지 모를 일이다
끝 모를 그리움으로 사는 세상엔 겨울햇살의 몸짓과 파열하는 빛살까지 ‘마요 마요 마요 마요’ 더 생각나는 이름의 즐비한 시편들
이제 놓겠습니다 아니 놓아도 되는 지요 달음질치는 세월이 하염없이 오가도 퇴색되거나 잊히는 게 아닌
저릿저릿 가슴 쓰라릴 십이월 열 이튿날에.
이가을 시인 / 향기로 피는 사람아
붉은 몸살꽃 피는 비봉공원엔 까르르한 바람도 살더라
지난 계절을 밀어내며 봄 햇살 질펀한 동산에는 자유로운 바람 휘적휘적 부푼 꽃망울을 불리고 있다 능선이며 산자락마다 무량한 그리움의 각혈로 핀 진달래는 나뭇가지 긴 마디마다 열꽃을 매달고 있다
야무진 빛살 낭자한 곳 웅숭깊고 초승달 눈웃음이 퍽이나 고운 이에게 함께 라서 외롭지 않지요? 이젠 행복만 할 겁니다 눈엣 말하니 연연한 꽃잎마냥 살포시 웃고 있다
고개 숙인 이들의 눈물샘이 차오르며 부풀려 진다
생전에는 미처 해독解讀하지 못했던 것들이
햇빛의 서체로 또박또박 읽히며 스스로를 지워갔다
그리운 얼굴 눈으로 만지다가 구겨진 파지처럼 주저앉고 싶은 날 어깨 토닥이던 햇살까지도 걸음마다 하냥 따라 걷는 속눈썹 젖는 사월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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