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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시인과 시(현대)

이관묵 시인 / 반지하 외 6편

by 파스칼바이런 2021. 10. 18.

이관묵 시인 / 반지하

 

 

갓 여남은 살이나 되었을까 사내아이가 반지하 단간 방 찬 바닥에 새우처럼 구부리고 잠을 잔다. 며칠 전 병원으로 실려 간 할머니의 잠을 둘둘 말아 개 놓고 오늘은 할머니가 입던 시간도 깨끗이 빨아 널었다. 연탄아궁이 앞 엎어진 운동화 한 짝은 모든 길이 공중에 나 있다는 걸 어떻게 알았을까? 지상의 물음에 지하의 묵묵부답이 깊어지는 세계. 절반은 낮이고 나머지 절반은 늘 끌고 다닌다. 오늘도 그 절반을 데리고 멀리 방파제 가서 한참을 앉았다 왔다.

 

 


 

 

이관묵 시인 / 물 다비식

 

 

물을 태우고 난 뒤

재를 헤집어 물소리 몇 과 수습하다

 

물소리는 물의 사리

물의 뼈

 

물소리 봉안할 절 한 채 지어야 하리

 

 


 

 

이관묵 시인 / 흑동백

 

 

이른 새벽

보육원 현관 앞 핏덩어리 던져 놓고

가다 돌아보고

가다 돌아보고

 

눈물!

 

얘야, 이 분이 네 엄마란다

나보다 푹신한

 

 


 

 

이관묵 시인 / 산딸나무 꽃

 

 

스님에게 물었다

 

-왜 이런 심산 절벽에 혼자 사시나요?

 

스님이 대답했다

 

-아무것도 하지 않으려고…

-말도…

-생각도…

 

또 물었다

 

-저 큰 돌부처를 어떻게 여기까지 모시고 왔나요?

 

스님이 말했다

 

-돌도 부처 안에 들어가면 말을 으깨더군. 모든 만물은 말을 죽이면 엄청 가볍거든

 

한참을

 

山僧처럼 뭉툭하다가

네게 건넬 말 한 송이 손질하다가

 

그렇게 또 한나절을

 

말 안의 나와

내 안의 말과

번갈아 두들겨 패다가

 

잊은 채 거기 놔두고 하산했다

 

꺼진 핸드폰을

하얀 멀미를

 

----이관묵 시집 {반지하}, (근간)에서

 

 


 

 

이관묵 시인 / 마음의 매립지

 

 

깊고 컴컴한 고샅길 곱게 여며 놓고

언덕 위 간판 내린 우체국 혼자 사신다

요양병원 모신 노부(老父) 같다

낮은 담장 넘겨다보는 이웃과 종일 침 흘리는 사립문과 어렵게 한 말씀씩 디뎌야 닿을 수 있는 돌층계 같은 자식 기웃대다가

요즘 비구름 받아내고 있다

마음에서 내려 마음 밀고 가다 놓쳐버린 고샅길

창문이 검버섯처럼 피었다

객지 떠돌다 반송된 이마들 뜯겨 있다

 

몸이 우편 행낭처럼 텅 비었다

자전거 바퀴 닮은

바람 빠진 시간 퇴근시키고 다른 사람 들렸다 빈털터리로 귀가하는 눈발에게 캄캄한 잠의 빈칸을 내준다

엽서 크기만한 마음의 매립지

몰려와 요양하고 있는 망초 명아주대 하늘타리 감태나무 빗자루풀 방가지똥 개자리 작살나무……

한밤에 무릎 꺾고 촉을 세워 썼던 잡풀들

써 놓고 발송하지 못한 잡풀들

옹기종기 모여 마음 쬐고 있다

 

 


 

 

이관묵 시인 / 물방울 꽃

 

 

   삭은 나뭇가지에 물방울 꽃 피었다

 

   마치 마음 내쫓고, 단단히 걸어 잠근 캄캄한 내 몸에 등(燈)을 걸어 놓은 듯, 제 뜻대로 살지 못해 휘어진 뉘우침들, 끝내 붙들지 못하고 놓쳐버린 초록의 장식들, 마음 깎아내고 허공에 뚫은 길들, 오지에 망명해 들어와 귀 틀어막고 사는 겨울, 이를 환하게 비추는 물방울 꽃

 

   물방울로 인해 환해지는 것들, 물방울로 인해 비로소 형체가 드러나는 무거운 머리통이며 억센 손목들, 어둠침침한 종교들, 오를 때마다 방향이 뒤바뀌던 층계들, 검은 입들, 죄다 내쫓았다 환하다

 

   많은 이들이 나를 빌려다가 읽었다 저녁보다 들판이 더 많은 페이지에 도착하자 엉망진창인 마음에 밑줄을 쳤다 그게 싫어 나는 나를 덮어버렸다 그 후부터 쉽게 어두워지고 일찍이 공중을 만났고 온종일 구름만 써내려갔다 곁에 물방울 환하게 켜놓고서.

 

   하늘을 잔뜩 칠해 놓은 하루, 자신에게 은둔해버린 길, 자신을 들이켜고 시들시들 사라진 길 환히 비춘다 어디에도 마음 묻히고 싶지 않다고, 무음(無音)이란 이런 것이라고.

 

 


 

 

이관묵 시인 / 흰 철쭉꽃

 

 

   흰 철쭉이 둥글게 피었다

   그 앞에 오그리고 앉은 저 노인

 

   빗돌 같다

 

   여기까지일세

   자네와 동행한 길

   여기부터는 나 혼자 가야 하네

 

   흰 글씨가 글썽글썽 피었다

 

 —시집『시간의 사육』(2013)에서

 

 


 

이관묵 시인

1947년 충남 공주에서 출생. 1978년 《현대시학》으로 등단. 시집으로 『동백에 투숙하다』『시간의 사육』『수몰지구』, 『변형의 바람』, 『저녁비를 만나거든』, 『가랑잎 경』 『반지하』등이 있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