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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시인과 시(현대)

이규리 시인 / 이른 봄 외 1편

by 파스칼바이런 2021. 10. 18.

이규리 시인 / 이른 봄

 

 

그 분하고 같은 된장찌개에 숟갈을 넣었을 때

 

그렇게

아찔할 수가 없었다

 

냄비 안에서 숟갈이 부딪혔을 때

 

그렇게

아득할 수가 없었다

 

먼 곳에서 희미하게 딩딩 종소리가 들려오기도 했다

이것이 끝이라 해도 끝 아니라 해도

 

다시 된장찌개에 숟갈을 넣었을 때

하얗고 먼 길 하나 휘어져 있었다

 

같은 아픔을 보게 되리라 손가락이 다 해지리라

 

어떻게 되든 이것은 나의 이야기이다

 

누추하기 이를 데 없는 곳으로 한 순간이 다가와 연(緣)을 두었고

슬픔을 결심하게 하였으니

 

지금도 아련히 더듬어 가 보는 그 햇빛 속

 

수저 소리 흐릿하게 남아 있던 그 점심나절에

내 일 모르듯 벙글던 흰 꽃들 아래에

 

 


 

 

이규리 시인 / 나무가 나무를 모르고

 

 

공원 안에 있는 살구나무는 밤마다 흠씬 두들겨맞는다

이튿날 가보면 어린 가지들이 이리저리 부러져 있고

아직 익지도 않은 열매가 깨진 채 떨어져 있다

새파란 살구는 매실과 매우 흡사해

으슥한 밤에 나무를 때리는 사람이 많다

 

모르고 때리는 일이 맞는 이를 더 오래 아프게도 할 것이다

키 큰 내가 붙어 다닐 때 죽자고 싫다던 언니는

그때 이미 두들겨맞은 게 아닐까

키가 그를 말해주는 것도 아닌데, 내가 평생

언니를 때린 건 아닐까

 

살구나무가 언니처럼 무슨 말을 하진 않았지만

매실나무도 제 딴에 이유를 남기지 않았지만

그냥 존재하는 것으로

한쪽은 아프고 다른 쪽은 미안했던 것

나중 먼 곳에서, 어느 먼 곳에서 만나면

우리 인생처럼

 

그 나무가 나무를 서로 모르고

 

 


 

이규리 시인

1955년 경북 문경에서 출생. 계명대학교 대학원 문예창작학과 졸업. 1994년 《현대시학》을 통해 등단.시집으로 『앤디 워홀의 생각』(세계사, 2004)과 『뒷모습』(랜덤하우스코리아,2006) 『최선은 그런 것이에요』등이 있음. 2015년 제6회 질마재문학상 수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