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규리 시인 / 이른 봄
그 분하고 같은 된장찌개에 숟갈을 넣었을 때
그렇게 아찔할 수가 없었다
냄비 안에서 숟갈이 부딪혔을 때
그렇게 아득할 수가 없었다
먼 곳에서 희미하게 딩딩 종소리가 들려오기도 했다 이것이 끝이라 해도 끝 아니라 해도
다시 된장찌개에 숟갈을 넣었을 때 하얗고 먼 길 하나 휘어져 있었다
같은 아픔을 보게 되리라 손가락이 다 해지리라
어떻게 되든 이것은 나의 이야기이다
누추하기 이를 데 없는 곳으로 한 순간이 다가와 연(緣)을 두었고 슬픔을 결심하게 하였으니
지금도 아련히 더듬어 가 보는 그 햇빛 속
수저 소리 흐릿하게 남아 있던 그 점심나절에 내 일 모르듯 벙글던 흰 꽃들 아래에
이규리 시인 / 나무가 나무를 모르고
공원 안에 있는 살구나무는 밤마다 흠씬 두들겨맞는다 이튿날 가보면 어린 가지들이 이리저리 부러져 있고 아직 익지도 않은 열매가 깨진 채 떨어져 있다 새파란 살구는 매실과 매우 흡사해 으슥한 밤에 나무를 때리는 사람이 많다
모르고 때리는 일이 맞는 이를 더 오래 아프게도 할 것이다 키 큰 내가 붙어 다닐 때 죽자고 싫다던 언니는 그때 이미 두들겨맞은 게 아닐까 키가 그를 말해주는 것도 아닌데, 내가 평생 언니를 때린 건 아닐까
살구나무가 언니처럼 무슨 말을 하진 않았지만 매실나무도 제 딴에 이유를 남기지 않았지만 그냥 존재하는 것으로 한쪽은 아프고 다른 쪽은 미안했던 것 나중 먼 곳에서, 어느 먼 곳에서 만나면 우리 인생처럼
그 나무가 나무를 서로 모르고
|
'◇ 시인과 시(현대)' 카테고리의 다른 글
이서화 시인 / 전생과 놀다 외 4편 (0) | 2021.10.18 |
---|---|
문선정 시인 / 우리 어머니 외 1편 (0) | 2021.10.18 |
이관묵 시인 / 반지하 외 6편 (0) | 2021.10.18 |
현상연 시인 / 장항아리 외 1편 (0) | 2021.10.18 |
송과니 시인 / 꿈의 잔영, 내 데칼코마니 (0) | 2021.10.18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