허수경 시인 / 스승의 구두
구두는 쉴새없이 낡아가고 장대동 중앙시장에는 새 상가가 들어섰다 어깨에 묻어오는 오늘의 피곤이 이십 년은 족히 넘은 스승의 서재에서 먼지로 앉고 스승은 넥타이를 푼다
새로 산 책을 넘긴다 스승은 새로운 학문을 수용하고 도시를 다스리는 정 의론과 인권론과 형평론을 안경 너머로 바라본다 눈을 부빈다
잠자리에 들어서도 스승은 낡아가고 구두는 현관에서 낡아가지만 내일도 장대동 중앙시장 새로 선 상가를 지나 하룻밤새 또 건물을 지은 도시의 길을 밟을 것이다
스승은 낡은 구두처럼 새 것으로 바뀌지 않는다 그러나 새롭게 등장하는 것들을 어깨에 짊어지고 스승이 낡아가는 것인가 새로운 모습으로 다가오는 모든 것들이 휠씬은 더 먼저 낡아갈 것인가
허수경 시인 / 기차는 간다
기차는 지나가고 밤꽃은 지고 밤꽃은 지고 꽃자리도 지네 오 오 나보다 더 그리운 것도 가지만 나는 남네 기차는 가네 내 몸 속에 들어온 너의 몸을 추억하거니 그리운 것들은 그리운 것들끼리 몸이 닮아 있었구나
허수경 시인 / 봄날은 간다
사카린같이 스며들던 상처야 薄粉의 햇살아 연분홍 졸음 같은 낮술 마음졸이던 소풍아 안타까움보다 더 광포한 세월아
순교의 순정아 나 이제 시시껄링으로 가려고 하네 시시껄렁이 나를 먹여살릴 때까지
허수경 시인 / 우연한 나의
내 마을은 우연한 나의 자연 내 말은 우연한 나의 자연 고속도로 위에 새가 죽어 있는 것을 보았다 그 새의 살을 들고 가서 누구도 삶지 않았다 우연히 죽은 새는 아무도 먹지 않네 살해당한 새만 먹을 수 있네
허수경 시인 / 구름은 우연히 멈추고
구름은 썩어가는 검은 건물 위에 우연히 멈추고 건물 안에는 오래된 편지, 저 편지를 아직 아무도 읽지 않았다. 누구도 읽지 않은 편지 위로 구름은 우연히 멈추고 곧 건물은 사라지고 읽지 않은 편지 속에 든 상징도 사라져갈 것이다 누구든 사라지는 상징을 앓고 싶었겠는가 마치 촛불 속을 걸어갔다가 나온 영혼처럼
허수경 시인 / 아버지, 나는 돌아갈 집이 없어요
당신은 당신의 집으로 돌아갔고 돌아갈 집이 없는 나는 모두의 집을 찾아 나섭니다
밤별에는 집이 없어요 구름 무지개 꽃잎에는 우리의 집이 없어요 나는 아버지가 돌아간 집에는 살 수 없는 것 세월이 가슴에 깊은 웅덩이로 엉겨 있듯 당연한 것입니다
전쟁을 겪어 불행한 세대가 전쟁을 겪지 않아 불행한 세대가 세월의 깃을 재우는 일조차 다른 것 그래서 나는 돌아갈 집이 없어요
배고픈 어미가 아이를 낳고 기르는 땅을 가로질러 함께 일을 하고 밥을 먹고 함께 노래를 하고 꿈을 꾸고
아버지 나는 갑니다 모두의 집을 찾아 칼을 들고 눈물 재우며
허수경 시인 / 저 山水가
저 山水가 날 기댈 데 없이 만드네 저 유정한 山水가 저 혼자 무정한 시절을 거느리려고 하는가
나 돌아갈 곳 저곳뿐 저곳뿐 생각나면 언제나, 비린 찬 올라오는 아침 밥상처럼 아늑한가
저건 처녀의 무릎, 저건 지옥 그야 뭐 다 놓아버리면 그만이지요
담담한 수채의 지옥, 그러나 저곳마저 기대지지 못한다 면 나 도시의 뒷골목에서 죽어야 하나
죽어 발목에 명찰을 달고 저 山水 속에 버려져야 하는 가 어쩔 수 없이 당신을 생각하며 가버려야 하는가
허수경 시인 / 맑은 전등
바다 마을 집 한 채
다리를 오므리고 실파를 다듬는 계집아이 튼 손등에 오그리고 앉은 실파 냄새
아이의 손눈썹이 파르르 떨린다
먼 검바다 뜬 배 닻에 붉은 오징어 다리가 감겼다 힘찬 오징어 다리
파뿌리처럼 오그리고 있다
허수경 시인 / 이상하다 왜 이리 조용하지
감꽃이 질 무렵 봄비는 적막처럼 내렸다
감꽃 천지 군화 발자욱이 그 위를 덮친다
집집마다 아픈 아이들 가위 눌린 잠 속으로 감꽃은 폭풍처럼 휩쓸고 다닌다
여러 살 속에 시린 날을 세우고 발진처럼 불거져 내리는 감꽃
대문 두드리는 소리 비명소리 미친 듯 떨어지는 감꽃 꼭지 그 위에 적막처럼 봄비가 내린다
날이 밝으면 왜 이리 조용하지 이상하다 아버지는 쓴 입 속으로 물을 넘긴다
먼 둔덕 애장터 오지 사금파리가 아리게 반짝이고 어른들은 화전을 부친다 오미자 물을 우려낸다
이상하다, 왜 이리 조용하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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