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민숙 시인 / 묘지 앞에서 -노을 속에 당신을 묻고
노을 속에 당신을 묻고 한 달 만에 내 잃어버린 사랑을 찾아 산을 오릅니다
당신은 그 사이 듬성듬성 잔디풀로 돋아나 있습니다.
엎드려 큰절 두 번 올리고 그대로 주저앉은 채 당신께 엉금엉금 안기어 봅니다
흙무덤 쥐어뜯으며 흔들어 깨워 보다 당신의 그림자만 안고 내려옵니다.
강민숙 시인 / 가슴으로 내리는 눈
이대로 사위어 가기에는 내 피는 아직도 따뜻한데
너는 내 가슴에 빈 발자국만 남긴 채 훌쩍 떠나 버리고
이 겨울 타는 가슴위로 눈은 내리고 밤은 자꾸 깊어 가는데
네가 없는 이 밤에 그 누가 저 눈발 헤치며 달려와 나를 지켜줄 것인가.
강민숙 시인 / 담쟁이덩굴 앞에서
벽을 다오 나에게 다시는 무너지지 않을 잎새 한 장 기대어 볼 벽 하나 돌려 다오
맞바람에 숭숭 뚫려버린 가슴 가누어 갈 벽 하나 내어 다오
얽히고 설킨 세상살이 내 어쩌다 밑동째 뽑혀 버리고 타는 입술이어야 하는가
담쟁이덩굴처럼 그대 곁에 다시 안기고 싶은데.
<문학수첩 / 노을 속에 당신을 묻고·1[하늘이 무너지던 날] / 강민숙>
강민숙 시인 / 짐승
내 가슴에 짐승 한 마리 살고 있다
실오라기 하나 걸치지 않은 짐승 한 마리 살고 있다
짐승이 벅벅 울어대는 밤이면 행여, 누가 볼까 조바심하여 진통제 한 알 삼키며 가슴 달랜다
그대 없는 이 가슴에 불같은 짐승 한 마리 살고 있다.
강민숙 시인 / 날개 꺽인 새 한 마리
내 안에 날개 꺽인 새 한 마리 울고 있어요
아무런 곡조도 없이 아무런 사연도 없이 구욱 ― 꾹
달랠 수도 보낼 수도 없어 내가 울어버리면
울지 않는 새 한 마리 내 가슴팍만 쪼고 있어요.
강민숙 시인 / 한 사람이 있다면
가다 길 물어보면 길 가르쳐 주는 이가 있다면
살다 그리울 적이면 달려와 줄 한 사람이 있다면
돌아서서 떠난다 해도 내 가슴속에 묻어 둘 그 한 사람이 곁에 있다면
내 행복할 텐데.
강민숙 시인 / 바다를 바라보며
그대 바다에는 바람이 부나요 파도가 치나요 파도보다 더 큰 풍랑이 이나요
내 그대 바다에 섬으로 떠서 노래 부르고 싶어라
비바람 폭풍우에 등 깍이며 살아있는 그날까지 그대 이름 부르리라.
<문학수첩 / 그대 바다에 섬으로 떠서 [노을 속에 당신을 묻고·1]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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