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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시인과 시(현대)

황병승 시인 / 가려워진 등짝 외 3편

by 파스칼바이런 2021. 10. 17.

황병승 시인 / 가려워진 등짝

 

 

오월, 아름답고 좋은 날이다

작년 이맘때는 실연(失戀)을 했는데

비 내리는 우체국 계단에서

사랑스런 내 강아지 짜부가

위로해주었지

'괜찮아 울지 마 죽을 정도는 아니잖아'

짜부는 넘어지지 않고

계단을 잘도 뛰어내려갔지

나는 골치가 아프고

다리에 힘이 풀려서

'짜부야 짜부야

너무 멀리 가지 말라고

엄마가 그랬을 텐데!"

소리치기도 귀찮아서

하늘이 절로 무너져 내렸으면

하고 바랐지

작년 이맘때에는

짜부도 나도

기진맥진한 얼굴로

시골집에 불쑥 찾아가

삶은 옥수수를 먹기도 했지

채마밭에 앉아

병색이 짙은 아빠의 얼굴을 쓰다듬으며

'괜찮아 걱정하지 마 아직은 안 죽어'

배시시 웃다가

검은 옥수수 알갱이를

발등에 흘렸었는데

어느덧 오월,

아름답고 좋은 날이 또다시 와서

지나간 날들이 우습고

간지러워서

백내장에 걸린 늙은 짜부를 들쳐업고

짜부가 짜부가

부드러운 앞발로

살 살 살 등짝이나 긁어주었으면

하고 바랐지

 

《현대문학》2010년 2월호

 

 


 

 

황병승 시인 / 이파리의 식사

 

 

시원스럽게 쏟아지는 빗소리를 들으며 잠에서 깨어났어요

어머니 빗소리가 좋아요

머리맡에서 검정 쌀을 씻으며 당신은 소리 없이 웃었고

그런데 참 어머니는 재작년에 돌아가셨잖아요

 

나는 두 번 잠에서 깨어났어요

창가의 제라늄이 붉은 땀을 뚝뚝 흘리는 여름 오후

 

안녕 파티에 올 거니 눈이 크구나 짧고 분명하게 종이인형처럼 말하는 여자친구

하나 갖고 싶은 계절이에요

 

언제부턴가 누렇게 변한 좌변기,에 앉아 열심히 삼십세를 생각하지만 개운하지 않아요

 

지독한 냄새를 풍기는 저 제라늄 이파리 어쩌면 시간의 것이에요

 

사람들과 방금 했던 약속조차 까맣게 잊는 날들

베란다에 서서 우두커니 놀이터를 내려다보고 있노라면

하나 둘 놀던 아이들이 지워지고

꿈속의 시계 피에로 들쥐들이

어느새 미끄럼들을 차지하는 사이......

 

거울 앞에 서서 어느 외로운 외야수를 생각해요

느리게 느리게 허밍을 하며. 오후 네 시,

 

바람은 꼭 텅 빈 짐승처럼 울고

 

살짝 배가 고파요

 

 


 

 

황병승 시인 / 검은 바지의 밤

 

 

호주머니를 잃어서 오늘밤은 모두 슬프다

광장으로 이어지는 계단은 모두 서른 두 개

나는 나의 아름다운 두 귀를 어디에 두었나

유리병 속에 갇힌 말벌의 리듬으로 입맞추던 시간들을.

오른 손이 왼쪽 겨드랑이를 긁는다 애정도 없이

계단 속에 갇힌 시체는 모두 서른 두 구

나는 나의 뾰족한 두 눈을 어디에 두었나

호수를 들어올리던 뿔의 날들이여.

새엄마가 죽어서 오늘밤은 모두 슬프다

밤의 늙은 여왕은 부드러움을 잃고

호위하던 별들의 목이 떨어진다

검은 바지의 밤이다

폭언이 광장의 나무들을 흔들고

퉤퉤퉤 분수가 검붉은 피를 뱉어내는데

나는 나의 질긴 자궁을 어디에 두었나

광장의 시체들을 깨우며

새엄마를 낳던 시끄러운 밤이여.

꼭 맞는 호주머니를 잃어서

오늘밤은 모두 슬프다

 

 


 

 

황병승 시인 / 여장남자 시코쿠

 

 

하늘의 뜨거운 꼭지점이 불을 뿜는 정오

 

도마뱀은 쓴다

찢고 또 쓴다

 

(악수하고 싶은데 그댈 만지고 싶은데 내 손은 숲 속에 있어)

 

양산을 팽개치며 쓰러지는 저 늙은 여인에게도

쇠줄을 끌며 불 속으로 달아나는 개에게도

 

쓴다 꼬리 잘린 도마뱀은

찢고 또 쓴다

 

그대가 욕조에 누워있다면 그 욕조는 분명 눈부시다

그대가 사과를 먹고 있다면 나는 사과를 질투할 것이며

나는 그대의 찬 손에 쥐어진 칼 기꺼이 그대의 심장을 망칠 것이다

 

열두 살 그때 이미 나는 남성을 찢고 나온 위대한 여성

미래를 점치기 위해 쥐의 습성을 지닌 또래의 사내아이들에게

날마다 보내던 연애편지들

 

(다시 꼬리가 자라고 그대의 머리칼을 만질 수 있을 때까지 나는

약속하지 않으련다 진실을 말하려고 할수록 나의 거짓은 점점 더 강렬해지고)

 

어느 날 누군가 내 필통에 빨간 글씨로 똥이라고 썼던 적이 있다

 

(쥐들은 왜 가만히 달빛을 거닐 지 못하는 걸까)

 

미래를 잊지 않기 위해 나는 골방의 악취를 견딘다

화장을 하고 지우고 치마를 입고 브래지어를 푸는 사이

조금씩 헛배가 부르고 입덧을 하며

 

도마뱀은 쓴다

찢고 또 쓴다

 

포옹을 할 때마다 나의 등 뒤로 무섭게 달아나는 그대의 시선!

 

그대여 나에게도 자궁이 있다 그게 잘못인가

어찌하여 그대는 아직도 나의 이름을 의심하는가

 

시코쿠, 시코쿠,

 

붉은 입술의 도마뱀은 뛴다

 

장문의 편지를 입에 물고

불 속으로 사라진 개를 따라

쓰러진 저 늙은 여자의 침묵을 타넘어

 

뛴다, 도마뱀은

 

창가의 장미가

검붉은 이빨로 불을 먹는 정오

 

숲 속의 손은 편지를 받아들고

꼬리는 그것을 읽을 것이다

 

(그대여 나는 그대에게 마지막으로 한 번 더 강렬한 거짓을 말하련다)

 

기다리라, 기다리라!

 

 


 

황병승[1970. 4. 4 ~ 2019. 7. 24]시인

1970년 서울에서 출생. 명지대학교대학원문예창작과 석사 수료. 2003년 《파라21》에 〈주치의 H〉외 5편의 시를 발표하며 등단. 시집으로 『여장남자 시코쿠』 『트랙과 들판의 별』 등이 있음. 제11회 박인환문학상과 2013년 제13회 미당문학상 수상. 2019년 요절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