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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시인과 시(현대)

허수경 시인 / 내 영혼은 오래되었으나 외 8편

by 파스칼바이런 2021. 10. 17.

허수경 시인 / 내 영혼은 오래되었으나

 

 

아이들은 장갑차를 타고 국경을 지나 천막 수용소로 들어가고

할미는 손자의 손을 잡고 노천 화장실로 들어간다

할미의 엉덩이를 빛은 어루만진다 죽은 아들을 낳을 때처럼

할미는 몽롱해지고 손자는 문 바깥에 서 있다 빛 너머로

바람이 일어난다

 

늙은 가수는 자선공연을 열고 무대에서 하모니카를 부른다

둥근 나귀의 눈망을 같은 아이의 영혼은 하모니카 위로 날아다닌다

내 영혼은 오래되었으나 빛 속으로 들어간 것처럼 아이의 영혼에 엉긴다

그러니까 누군가를 기다리는 영혼처럼 허덩거리며 하모니카의 빠각이는

이빨에 실핏줄을 끼워넣는다

 

내 영혼은 오래되었으나 장갑차에 아이들의 썩어가는 시체를 싣고

가는 군인의 나날에도 춤을 춘다 그러니까 내 영혼은 내 것이고

아이의 것이고 내 영혼은 오래되었으나

 

 


 

 

허수경 시인 / 공터의 사랑

 

 

한참 동안 그대로 있었다

썩었는가 사랑아

 

사랑은 나를 버리고 그대에게로 간다

사랑은 그대를 버리고 세월로 간다

 

잊혀진 상처의 늙은 자리는 환하다

환하고 아프다

 

환하고 아픈 자리로 가리라

앓는 꿈이 다시 세월을 얻을 때

 

공터에 뜬 무지개가

세월 속에 다시 아플 때

 

몸 얻지 못한 마음의 입술이

어느 풀잎자리를 더듬으며

말 얻지 못한 꿈을 더듬으리라

 

 


 

 

허수경 시인 / 바다가

 

 

깊은 바다가 걸어왔네

나는 바다를 맞아 가득 잡으려 하네

손이 없네 손을 어디엔가 두고 왔네

그 어디인가, 아는 사람 집에 두고 왔네

 

손이 없어서 잡지 못하고 울려고 하네

눈이 없네

눈을 어디엔가 두고 왔네

그 어디인가, 아는 사람 집에 두고 왔네

 

바다가 안기지 못하고 서성인다 돌아선다

가지 마라 가지 마라, 하고 싶다

혀가 없다 그 어디인가

아는 사람 집 그 집에 다 두고 왔다

 

글썽이고 싶네 검게 반짝이고 싶었네

그러나 아는 사람 집에 다, 다,

두고 왔네

 

 


 

 

허수경 시인 / 마치 꿈꾸는 것처럼

 

 

너의 마음 곁에 나의 마음이 눕는다

만일 병가를 낼 수 있다면

인생이 아무려나 병가를 낼 수 있으려고......,

 

그러나 바퀴마저 그러나 너에게 나를

그러나 어리숙함이여

 

햇살은 술이었는가

대마잎을 말아 피던 기억이 왠지 봄햇살 속엔 있어

 

내 마음 곁에 누운 너의 마음도 내게 묻는다

무엇 때문에 넌 내 곁에 누웠지? 네가 좋으니까, 믿겠니?

믿다니!

 

내 마음아 이제 갈 때가 되었다네

마음끼리 살 섞는 방법은 없을까

 

조사는 쌀 구하러 저자로 내려오고 루핑집 낮잠자는 여자

여 마침 봄이라서 화월지풍에 여자는 아픈데

조사야 쌀 한줌 줄 테니 내게 그 몸을 내줄라우

 

네 마음은 이미 떠났니?

내 마음아, 너도 진정 가는 거니?

 

돌아가 밥을 한솥 해놓고 솥을 허벅지에 끼고 먹고 싶다

마치 꿈처럼

잠드는 것처럼

죽는다는 것처럼

 

 


 

 

허수경 시인 / 오후 두시경

 

 

영상 15도

바람은 서북, 구름

 

아침에 잠깐 안개구름이 지나가고 난 뒤

맑은 하늘

 

오후 두시경

문 앞에 하얀 병원차가 서고 들것을 들고

하얀 남자들이 문 안으로 들어갔다 나온다

배달한 음식의 빈 식기를 가져나오듯 무념한 얼굴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는가

 

거미줄, 정원, 그림 같은 꽃, 구두 한짝, 그리고 반쯤 열린 문

 

 


 

 

허수경 시인 / 먹고 싶다

 

 

서울 처음 와서 처음 뵙고 이태 만에 다시 뵙게 된 어른이

이런 말을 하셨다 자네 얼굴, 못 알아볼 만큼 변했어

 

나는 이 말을 듣고

광화문, 어느 이층 카페 구석 자리에 가서 울었다

서울 와서 내가 제일 많이 중얼거린 말

먹고 싶다......,

살아내려는 비통과 어쨌든 잘 살아 남겠다는 욕망이

뒤엉킨 말, 먹고 싶다

한 말의 감옥이 내 얼둘을 변하게 한 공포가

삼류인 나를 마침내 울게 했다

그러나 마침내 반성하게 할까!

 

나는 드디어 순결한 먹고 싶음을 버렸다 서울에 와서

순결한 먹고 싶음을 버리고

조균의 어리석음, 발바닥의 들큰한 뿌리

그러나 사랑이여, 히죽거리며 내가 너의 등을

찾아 종알거릴 때 막막한 나날들을

함께 무너져주겠는가, 이것의 먹고 싶음,

 

그리고 나는 내 얼굴을 버리고

길을 따라 생긴 여관에 내 마음초자 버리고

안녕이라 말하지 마 나는, 먹고 싶다......,

오오, 날 집어치우고......

 

 


 

 

허수경 시인 / 어느날 애인들은

 

 

나에게 편지를 썼으나 나는 편지를 받아보지 못하고 내영혼은 우는 아이 같은 나를 달랜다 그때 나는 갑자기 나이가 들어 지나간 시간이 어린 무우잎처럼 아리다 그때 내가 기억하고 있던 모든 별들은 기억을 빠져나가 제 별자리로 올라가고 하늘은 천천히 별자리를 돌린다 어느날 애인들은 나에게 편지를 썼으나 나는 편지를 받지 못하고 거리에서 쓰러지고 바람이 불어오는 사이에 귀를 들이민다 그리고

 

 


 

 

허수경 시인 / 달 빛

 

 

부르는 소리로 저리도 청량하게 흐를 수 있는 세상은 두렵습니다 아름다워진 것이 겁나고 오밀조밀하게 색칠한 것이 화정독 오른 계집 아침 분세수 세모시 옷깃 새로 페니실린 냄새가 납니다 물결같이 이를 악물고 바스라지기도 하지만 아래에 서면 빛나고 싶어 두려워집니다 희끗희끗 칼금 그으며 지나는 바람이 나뭇잎 수척한 얼굴에 계절 굽이지는 길을 만들고 그 길 위에 내려앉아 우수수 몸을 떨지만 거미줄은 은빛으로 빛나도 나비는 거미에게 먹히고 불러세워 뒤돌아보아도 나는 몇 광년 후에야 보는 별빛으로 먼데요

 

 


 

 

허수경 시인 / 입맞춤

 

 

그 양반 생각만 하모 지금도 오만간장이 다 오그라붙제 무정한 양반 아니여

유정한 시절 꽃 분분 가슴살에 꽂힌 바람 된통부를 꽃물 듣는 아린 날 눈뜨면

멀어질새 눈감으면 흩어질새 부러 감은 듯 마는 듯 다소곳 숨죽인 듯 화들짝

불에 데인 듯 떨며 떨며 천지간에 둘도 없이 초승달 떼구름 흰 옷고름 개켜

넣으며 설핏허니 굴참남게로 넘어가면 이년 눈이 뒤집혀 병든 애비 버려두고

꺼짐부리 살림 접어두고 고만 밤도망질 치고 말았제 무정한 양반 대처살이

모질새 애먼년 눈 맞춰 나 버려두고 간 뒤 그 밤만 생각하모 불쌍한 울 아버지

쿵쿵 가래 기침에 엎어지며 끓여 먹을 냄비밥 간장종지가 더 애닯데이 더 목매인데이

 

 


 

허수경(許秀卿) 시인

1964년 경남 진주에서 출생. 경상대학교 국어국문학과 졸업. 1987년 《실천문학》복간호에 시가 실리면서 등단. 시집으로 『슬픔만한 거름이 어디 있으랴』, 『혼자 가는 먼 집』, 『내 영혼은 오래되었으나』 등과 수필집 『길모퉁이의 중국식당』 그리고 번역서 『끝없는 이야기』가 있음. 2?001년 동서문학상, 2016년 전숙희문학상과 '제15회 이육사문학상' 수상. 〈21세기 전망〉 동인으로 활동. 2018년 10월 3일 위암투병 중 별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