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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시인과 시(현대)

강순 시인 / 한밤에 내가 배달된다 외 1편

by 파스칼바이런 2021. 10. 17.

강순 시인 / 한밤에 내가 배달된다

 

 

한밤에 내가 배달된다

막대사탕을 빨고 있는 나와 입술이 녹아내리는 나

내게 막대사탕을 던지는 나와 왼쪽 눈을 찔린 나

 

기억을 해독하는 어둠 속

당신은 내가 아끼는 나침반을 훔쳐들고 멀어져간다

 

나는 목이 없고 당신은 귀가 없어 아무것도 들리지 않아

우리는 입술이 녹아내리며 사탕을 빠는 인형들

 

진실은 산스크리트어 불경처럼 난해해서

심장을 지배하는 노래가 되다 마는 걸까

 

어떤 인형은 풍문의 모서리에 가슴 베인 후

한밤에 조금씩 녹아내려 왼쪽으로 기운다네

 

기억의 미로에서 키운 근육들이 사라지는 심연

내 것인지 당신 것인지 구분할 수 없는 등뼈만 남기고

못내 쓸쓸히 사라져갈 것을 아는

작은 눈사람

 

당신에게는 어떤 내가 배달되나요?

온통 하얀 옷을 입고 얼굴이 서쪽으로 슬프게 흐른다면

그건 나일 거예요 왼쪽 볼에 박힌 별이 녹아내리는

흐물흐물한 꿈이라면 진짜 나일 거예요

 

만지면 바스라지다가 물이 되었다가 말라 버리는

당신 안에 망연한 상념조차 남기지 않는

 

오래된 박하사탕 맛이 나는

왼쪽 어깨가 없는 눈사람 인형이

한밤에 배달된다면

 

계간 『리토피아』 2021년 여름호 발표

 

 


 

 

강순 시인 / 온종일 걸었다

 

 

해답 없는 질문들을 버겁게 둘러메고

거울 속으로 옷장 속으로 정처 없이 걸었다

 

문을 부수며 혹은 문을 세우며

벽지 무늬마다 붉은 눈동자를 박으며

 

죽은 너의 이름 애타게 부르며

우리는 어디에 있지? 찢긴 불경과 성경책을 밟으며

 

햇빛 안 드는 네 방에 허망하게 널브러진 목숨 일으켜

여기가 아니라면 어디라도 가자

엄마, 심부름을 완수하면 칭찬 쿠폰 백 개 주세요

 

죽을힘을 다해 벽을 넘으면 여태 그 자리

네가 평생 건너지 못한 사막은 나의 사막

 

불을 끄고 벽 속에 들어가 앉았더니

불면증과 거식증에 걸린 낙타가

죽을 때까지 물을 만나지 못한 목마름으로

광폭한 사막에 신음을 토하다

원래 주인 없는 그림자처럼 온몸이 사그라진다

 

발을 뒤집어 보면 너는 발뒤꿈치가 없네

 

다리가 삼백육십오 개인 벌레 같은 태양아

우리는 어디쯤 왔니? 바다 위로 솟구치는 청고래를 만날 때까지

 

도착이라는 말 없는 발바닥이 뭉개지는 말

울음조차 말라가는 오염된 이생에서

 

무너진 모래집 뒤로하고

고래가 쉬어 가는 섬 방향으로

막막한 그 말을 찾아 두 눈이 벌게지도록

온종일 걷고 또 걸었다

 

계간 『리토피아』 2021년 여름호 발표

 

 


 

강순 시인

1998년 《현대문학》에 〈사춘기〉 외 4편으로 등단. 시집으로 『이십대에는 각시붕어가 산다』,『즐거운 오렌지가 되는 법』 등이 있음. 2019년 경기문화재단 우수작가 기금 수혜. 한양대학교 대학원 국어국문학과 박사 수료. 웹진 『시인광장』 편집위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