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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시인과 시(현대)

이정원 시인 / 누란(樓蘭)에 서다 외 5편

by 파스칼바이런 2021. 10. 17.

이정원 시인 / 누란(樓蘭)에 서다

 

 

단산한 여자처럼 누워 있는 새만금 개펄

퇴박맞고 나뒹구는 몸뚱이 여기저기 마른버짐 피우고 있다

 

죽은 농게 눈에 화석처럼 박힌 갯내, 무딘 게걸음으로 걸어와 코 끝 지분거리는데

 

잘못 왔다, 길을 잘못 들었어,

빈 부리 치켜든 청둥오리가 개펄을 박차고 날아오른다

 

뻘 속에 묻혀 살다 뻘이 되어버린 아낙들 속 빈 백합을 캐고 있다 끊임없이 헛손질만 하고 있다

 

갈고리를 물고 늘어지는 뻘의 입 옥니처럼 꼭 다물고 놓지 않는다 무언가 단단히 하소연할 게 있다는 눈치다

 

먼 서역이 아니더라도, 어디든 누란은 있다

 

소실된 왕국의 유적처럼 쓸쓸한 패총만 남은 마른 개펄 위

자멸하듯, 석양이

 

아낙들 등에 칼을 꽂는다

 

(<시와시> 2011년 여름호)

 

 


 

 

이정원 시인 / 흙의 사랑법

 

 

독을 묻었네

마당을 파고 김치독을 묻었네

흙에서 난 배추를

흙으로 만든 독에 담아

다시 흙에 묻었네

흙은 독을 발효시키고

독은 배추를 발효시키고

배추는 나를 발효시킬 것이네

맛이 깊어질수록

독은 점점 제 속을 비워

나를 끌어당길 것이네

겨울이 깊어질수록

나는 독 안으로

한없이 꺼져 들어갈 것이네

 

 


 

 

이정원 시인 / 슬픈 과녁

 

 

비 그친 사이

고추잠자리 한 쌍 옥상 위를 빙빙 돌고 있다

두 마리가 하나로 포개져 있다

 

누가 누구를 업는다는 거

업고 업히는 사이라는 거

오늘은 왠지 아찔한 저 체위가 엄숙해서 슬프다

 

서로가 서로에게 서러운 과녁으로 꽂혀서

맞물린 몸 풀지 못하고

땅에 닿을 듯 말 듯 스치며 나는 임계선 어디쯤

 

문득 삶과 죽음의 갈림길이 있다

앉는 곳이 곧 무덤일

질주의 끝이 곧 휴식일 어느 산란처

 

죽은 날개는 너무 투명해서 내생까지 환히 들여다보인다

 

 


 

 

이정원 시인 / 망상어를 키우다

 

 

내 머릿속 자산어보에는

망상어만 산다

감성돔을 잡고 싶은데

수면 속에 서서히 잠기는 찌를 노려보다가

이거다! 싶어서 잡아챈 손 끝에

불쑥 떠오르는 건 망상어뿐이다

놀래미나 볼락도 아닌 늘 그놈의 망상어가 문제다

입질은 분명 벵어돔이었는데

손맛은 분명 감성돔이었는데

딸려 올라오는 건 영락없이 망상어란 놈뿐이다

 

언제쯤 감성돔 잡을 수 있을까

별똥별 잘게 부수어 밑밥을 뿌려본다

손톱달로 찌를 달아도 보고

내 영혼 21그램, 봉돌로 매어 본다

본류대가 지친 숨결을 파도에 얹을 때까지

수중여에 가부좌 틀고 앉아

짜릿한 입질의 순간 기다려도 본다

 

시간은 무장무장 릴을 풀고

깜박 졸았던가?

 

채비가 조류를 타고 먼 은하수로 흘러가버렸다

 

이게 웬 망상?

 

 


 

 

이정원 시인 / 마음이라는 것

 

 

개심사(開心寺)에 가면 저절로 열리는 줄 알았네

마음의 문(門),

산문이 어림없다고 세심동(洗心洞) 표석을 세워  어르고 있네

씻을 마음을 찾았으나 고놈의 것

벌써 휘적휘적 돌계단 앞서 오르고 있네

뒤쫓는 몸만 가쁜 숨으로 빵빵하네

씻을 마음이 어디에 있느냐고

있으면 내놓아보라고

연못가에 가부좌 튼 바람에게 묻네

씻을 것도 씻길 것도 없으니

열 것도 열릴 것도 없지 않느냐 따져 묻네

아하,

백 년쯤 제 속을 들여다보며 마음 닦아

환골탈태하고도

씻을 것 있다고 연못 속에 몸 담그고 있는 배롱나무

불쑥 심검을 들이대는데

굽으면 굽은 대로 휘면 휜 대로 흘러가게 두라네

멀찍이 고개 끄덕이는 심검당(尋劒堂) 배흘림기둥

마음의 문고리 슬쩍 잡아당기고

고놈의 마음, 열릴 듯 말듯하고

 

 


 

 

이정원 시인 / 깜냥

 

 

그늘을 늘였다 줄였다, 머리를 감았다 털었다, 삼투압을 높였다 내렸다,

 

호숫가 수양버들

제 맘대로다

 

입양한 까치새끼를 파양한다고 법석을 떨더니

구름 양산 쓰고 낚싯줄 드리우고 서서

잉어를 낚았다 풀어줬다,

 

그늘 멍석을 펴는 오후가 되면

거동 불편한 노인 몇 불러내는데

흐릿한 시선 거두어 호수 저편까지 실어 나르는데

 

얼굴 주름 늘였다 줄였다, 명아주지팡이 싹둑 잘랐다 이었다,

 

줄줄이 하프를 퉁기다 말다, 비음을 날리다 말다,

 

깜냥대로

호수를 휘젓고 산다

 

 


 

이정원 시인

경기도 이천에서 출생. 인천교육대학 졸업. 2005년 계간 《시작》으로 등단. 2009년 문예진흥기금과 경기도 창작지원금 수혜. 시집으로 『내 영혼 21그램』(천년의시작, 2009)이 있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