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정원 시인 / 누란(樓蘭)에 서다
단산한 여자처럼 누워 있는 새만금 개펄 퇴박맞고 나뒹구는 몸뚱이 여기저기 마른버짐 피우고 있다
죽은 농게 눈에 화석처럼 박힌 갯내, 무딘 게걸음으로 걸어와 코 끝 지분거리는데
잘못 왔다, 길을 잘못 들었어, 빈 부리 치켜든 청둥오리가 개펄을 박차고 날아오른다
뻘 속에 묻혀 살다 뻘이 되어버린 아낙들 속 빈 백합을 캐고 있다 끊임없이 헛손질만 하고 있다
갈고리를 물고 늘어지는 뻘의 입 옥니처럼 꼭 다물고 놓지 않는다 무언가 단단히 하소연할 게 있다는 눈치다
먼 서역이 아니더라도, 어디든 누란은 있다
소실된 왕국의 유적처럼 쓸쓸한 패총만 남은 마른 개펄 위 자멸하듯, 석양이
아낙들 등에 칼을 꽂는다
(<시와시> 2011년 여름호)
이정원 시인 / 흙의 사랑법
독을 묻었네 마당을 파고 김치독을 묻었네 흙에서 난 배추를 흙으로 만든 독에 담아 다시 흙에 묻었네 흙은 독을 발효시키고 독은 배추를 발효시키고 배추는 나를 발효시킬 것이네 맛이 깊어질수록 독은 점점 제 속을 비워 나를 끌어당길 것이네 겨울이 깊어질수록 나는 독 안으로 한없이 꺼져 들어갈 것이네
이정원 시인 / 슬픈 과녁
비 그친 사이 고추잠자리 한 쌍 옥상 위를 빙빙 돌고 있다 두 마리가 하나로 포개져 있다
누가 누구를 업는다는 거 업고 업히는 사이라는 거 오늘은 왠지 아찔한 저 체위가 엄숙해서 슬프다
서로가 서로에게 서러운 과녁으로 꽂혀서 맞물린 몸 풀지 못하고 땅에 닿을 듯 말 듯 스치며 나는 임계선 어디쯤
문득 삶과 죽음의 갈림길이 있다 앉는 곳이 곧 무덤일 질주의 끝이 곧 휴식일 어느 산란처
죽은 날개는 너무 투명해서 내생까지 환히 들여다보인다
이정원 시인 / 망상어를 키우다
내 머릿속 자산어보에는 망상어만 산다 감성돔을 잡고 싶은데 수면 속에 서서히 잠기는 찌를 노려보다가 이거다! 싶어서 잡아챈 손 끝에 불쑥 떠오르는 건 망상어뿐이다 놀래미나 볼락도 아닌 늘 그놈의 망상어가 문제다 입질은 분명 벵어돔이었는데 손맛은 분명 감성돔이었는데 딸려 올라오는 건 영락없이 망상어란 놈뿐이다
언제쯤 감성돔 잡을 수 있을까 별똥별 잘게 부수어 밑밥을 뿌려본다 손톱달로 찌를 달아도 보고 내 영혼 21그램, 봉돌로 매어 본다 본류대가 지친 숨결을 파도에 얹을 때까지 수중여에 가부좌 틀고 앉아 짜릿한 입질의 순간 기다려도 본다
시간은 무장무장 릴을 풀고 깜박 졸았던가?
채비가 조류를 타고 먼 은하수로 흘러가버렸다
이게 웬 망상?
이정원 시인 / 마음이라는 것
개심사(開心寺)에 가면 저절로 열리는 줄 알았네 마음의 문(門), 산문이 어림없다고 세심동(洗心洞) 표석을 세워 어르고 있네 씻을 마음을 찾았으나 고놈의 것 벌써 휘적휘적 돌계단 앞서 오르고 있네 뒤쫓는 몸만 가쁜 숨으로 빵빵하네 씻을 마음이 어디에 있느냐고 있으면 내놓아보라고 연못가에 가부좌 튼 바람에게 묻네 씻을 것도 씻길 것도 없으니 열 것도 열릴 것도 없지 않느냐 따져 묻네 아하, 백 년쯤 제 속을 들여다보며 마음 닦아 환골탈태하고도 씻을 것 있다고 연못 속에 몸 담그고 있는 배롱나무 불쑥 심검을 들이대는데 굽으면 굽은 대로 휘면 휜 대로 흘러가게 두라네 멀찍이 고개 끄덕이는 심검당(尋劒堂) 배흘림기둥 마음의 문고리 슬쩍 잡아당기고 고놈의 마음, 열릴 듯 말듯하고
이정원 시인 / 깜냥
그늘을 늘였다 줄였다, 머리를 감았다 털었다, 삼투압을 높였다 내렸다,
호숫가 수양버들 제 맘대로다
입양한 까치새끼를 파양한다고 법석을 떨더니 구름 양산 쓰고 낚싯줄 드리우고 서서 잉어를 낚았다 풀어줬다,
그늘 멍석을 펴는 오후가 되면 거동 불편한 노인 몇 불러내는데 흐릿한 시선 거두어 호수 저편까지 실어 나르는데
얼굴 주름 늘였다 줄였다, 명아주지팡이 싹둑 잘랐다 이었다,
줄줄이 하프를 퉁기다 말다, 비음을 날리다 말다,
깜냥대로 호수를 휘젓고 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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