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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시인과 시(현대)

박일환 시인 / 용만이 형이 준 양말 외 2편

by 파스칼바이런 2021. 10. 17.

박일환 시인 / 용만이 형이 준 양말

 

 

영도조선소 가는 길은 멀고 멀어서

김진숙은 만나지 못하고

용만이 형만 만나고 왔네

온종일 퍼부어댄 장대비에

멀리서 온 벗들 양말이 젖었을까봐

새 양말 스무 켤레를 가방에 넣어온

용만이 형 손에 이끌려 간 자갈치횟집

가지런히 썰려 나온 회들은 연하고 부드러웠으나

미안하고 고맙다며, 소주를 따라주는

용만이 형 손은 뭉툭하고 거칠었네

눈물 나는 일들이야 영도다리 아래로

소줏잔 비워내듯 털어버리고 싶었으나

크레인에 올라가 있는 김진숙이나

평생 연장에 매여 살아온 용만이 형 앞에서

내가 먼저 미안하고 고맙다는 말 전하고 싶었으나

차벽처럼 거대하고 단단한 것들이

자꾸만 명치끝을 눌러대는 바람에

급하게 용만이 형 가방에서 양말 하나 뺏어 신고

찔끔 눈물 한 방울 흘렸던가

피할 수 없는 고립을 감내하는 일이

얼마나 아득한 일인지 모르는 나는

용만이 형이 김진숙이고

김진숙이 용만이 형이라고,

용만이 형한테 얻어 신은 양말이

실은 김진숙이 보내준 거라고,

애써 자위하며 돌아섰네

용만이 형 가방에서 나온 양말을 신고

영도조선소 앞 봉래 로터리를 떠나왔네

 

 


 

 

박일환 시인 / 날개의 행방

 

 

높이 나는 새가 멀리 보고

일찍 일어나는 새가 벌레를 잡는다

 

하지만 우린 날개가 없잖아요

압수해 간 날개부터 돌려주고 말하세요

 

 


 

 

박일환 시인 / 먼 나라

 

 

먼 나무 아래 서서

먼 나라를 생각한다

내 나라가 가장 먼 나라였던 한 사람을 떠올린다

 

그 사람이 만들었다는 선율과

통영 앞바다와

기약 없는 그리움에 대해 말하려면

 

먼 나무 앞에 서봐야 한다

다닥다닥 맺힌 붉은 열매 속으로 들어 가봐야 한다

 

나에게 가는 길이 가장 멀다고 늘 생각해왔지만

먼 나무 한 그루

내 가슴에 옮겨 심지 못했다

 

죽어서야

먼 나무 한 그루로 고향 땅에 뿌리내린

그런 사람도 있다고 중얼거릴 때

 

나라 같은 것 모르는 참새 한 마리

누군가를 부르러 가는지 훌쩍 날아오른다

 

*통영에 있는 윤이상기념관 앞에 먼 나무가 서 있다.

 

 


 

박일환 시인

1961년, 충북 청주시 출생. 경희대 국문과 졸업. 1997년 《내일을 여는 작가》의 추천으로 등단. 저서로는 시집으로 『푸른 삼각뿔』『끊어진 현』, 『덮지 못한 출석부』, 『등 뒤의 시간』과 해설집 『선생님과 함께 읽는 이용악』이 있음. 구일중학교 교사. 1992. 제4회 전태일문학상 단편소설부분 수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