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일환 시인 / 용만이 형이 준 양말
영도조선소 가는 길은 멀고 멀어서 김진숙은 만나지 못하고 용만이 형만 만나고 왔네 온종일 퍼부어댄 장대비에 멀리서 온 벗들 양말이 젖었을까봐 새 양말 스무 켤레를 가방에 넣어온 용만이 형 손에 이끌려 간 자갈치횟집 가지런히 썰려 나온 회들은 연하고 부드러웠으나 미안하고 고맙다며, 소주를 따라주는 용만이 형 손은 뭉툭하고 거칠었네 눈물 나는 일들이야 영도다리 아래로 소줏잔 비워내듯 털어버리고 싶었으나 크레인에 올라가 있는 김진숙이나 평생 연장에 매여 살아온 용만이 형 앞에서 내가 먼저 미안하고 고맙다는 말 전하고 싶었으나 차벽처럼 거대하고 단단한 것들이 자꾸만 명치끝을 눌러대는 바람에 급하게 용만이 형 가방에서 양말 하나 뺏어 신고 찔끔 눈물 한 방울 흘렸던가 피할 수 없는 고립을 감내하는 일이 얼마나 아득한 일인지 모르는 나는 용만이 형이 김진숙이고 김진숙이 용만이 형이라고, 용만이 형한테 얻어 신은 양말이 실은 김진숙이 보내준 거라고, 애써 자위하며 돌아섰네 용만이 형 가방에서 나온 양말을 신고 영도조선소 앞 봉래 로터리를 떠나왔네
박일환 시인 / 날개의 행방
높이 나는 새가 멀리 보고 일찍 일어나는 새가 벌레를 잡는다
하지만 우린 날개가 없잖아요 압수해 간 날개부터 돌려주고 말하세요
박일환 시인 / 먼 나라
먼 나무 아래 서서 먼 나라를 생각한다 내 나라가 가장 먼 나라였던 한 사람을 떠올린다
그 사람이 만들었다는 선율과 통영 앞바다와 기약 없는 그리움에 대해 말하려면
먼 나무 앞에 서봐야 한다 다닥다닥 맺힌 붉은 열매 속으로 들어 가봐야 한다
나에게 가는 길이 가장 멀다고 늘 생각해왔지만 먼 나무 한 그루 내 가슴에 옮겨 심지 못했다
죽어서야 먼 나무 한 그루로 고향 땅에 뿌리내린 그런 사람도 있다고 중얼거릴 때
나라 같은 것 모르는 참새 한 마리 누군가를 부르러 가는지 훌쩍 날아오른다
*통영에 있는 윤이상기념관 앞에 먼 나무가 서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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