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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시인과 시(현대)

장성혜 시인 / 요상한 동물 외 5편

by 파스칼바이런 2021. 10. 17.

장성혜 시인 / 요상한 동물

 

 

나는 꼬리가 깁니다

자르고 달아나면 다시 자라나지요

지하에서 지하로 옮겨 다니며

그냥 주문대로 샘플을 보고 가방을 만드는데

형사들이 백여우라 부르며 잡으러 다니지요

샘플이 어떻게 굴러 오는지 모르지만

똑같이 만들어내는 데는 귀신이랍니다

원가에 삼천 원을 붙여 넘긴 가방이

어디에서 명품으로 둔갑하는지 나는 모릅니다

내가 만든 만 원짜리 가방이 수백만 원짜리 명품으로 팔린다는 말을 들으면

입이 다물어지지 않을 뿐이지요

명품만 찾는 요상한 세상에서

도망 다니느라 귀는 커지고 자라목이 되어가고 있습니다

명품족들은 어떻게 생겨 먹었을까요

나는 명품을 보지 못했으니까요, 샘플도 짝퉁이거든요

아는 것이라고는 가방 만드는 재주밖에 없어

전문가도 속아 넘어간다는 솜씨로

입에 풀칠하기 위해 명품딱지 붙은 가방을 만듭니다

굴속 같은 방에서 긴 꼬리는 숨기고 삽니다

 

 


 

 

장성혜 시인 / 공범

 

 

연탄 한 장 사라진 밤이 지나면

아침부터 수돗가는 벌겋게 달아올랐다

연탄 한 장에 벌벌 떠는 사람들은

불문을 막아놓고 서로 의심했다

모두 결백하다고 울대를 부풀리며 달려들었지만

아무도 용의 선상에서 벗어나지 못했다

십구 공탄 구멍처럼 방들이 많은 집

허술하게 달린 간이부엌은 틈도 많았다

연탄 한 장을 든 검은 그림자가 사라지는 곳을

그 틈으로 보았지만 입을 다물었다

건넛방에는 목소리가 제일 큰 여자가 살았다

누군가 연탄불이 꺼졌다고 하면 선뜻

불을 빼주겠다고 나서는 것도 그 방 여자였다

불이 붙은 연탄을 마당에 눕혀놓고 식칼로 잘랐다

검은 그림자가 그녀라는 것이 내 입을 틀어막게 했다

도둑년들이 사는 집, 연탄을 세어놓고 잠드는 엄마는

세상에 믿을 구멍은 하나도 없다고 했다

그날도 연탄 한 장이 사라졌다는 소리가 들렸지만

그 방은 조용했다, 소리없이 눈이 내리고 있었다

무거워진 연탄가스가 몰래 스며들었다는 걸

아무도 눈치채지 못하고 있었다

 

 


 

 

장성혜 시인 / 높은 바닥

 

 

그래, 올라와

징그러운 몸뚱어리로

여긴 이 아파트 꼭대기 층 화장실이니

더는 치고 올라갈 바닥도 없는 끝이니

오라고

탈주극 주인공같이 하수관을 타고

기어오르라고

불을 켜는 순간

배수구를 빠져나오는 너와 마주친 나도

바닥에서 바닥으로 올라가는 중이지

한집도 빠짐없이 소독하란 방송이 두 번이나 있었으니

목숨 걸고 올라올 만도 하지

약에 취해 비틀거리면서도 전속력으로 달아나보라고

어떻게든 살아남을 구멍을 찾아

벽을 타고 천장으로 올라가다

지금처럼 슬리퍼에 배가 터져 죽더라도

올라오라고

희망이라는 바퀴벌레여

어둠 속에 알을 남기고

죽을 힘을 다해 올라가다

마주쳐 내가 밟아 죽이더라고

또, 오라고

 

 


 

 

장성혜 시인 / 금 캐는 시간

 

 

김순남 씨 하루는 마나도* 샬디보다 2시간 일찍 해가 뜬다

해가 뜨기도 전에 리어카를 끌고 좁은 골목을 내려온다

빛바랜 해병대 모자를 눌러쓰고 고물을 줍기 시작한다

2시간 후 마나도 광부 샬디가 야자수 숲길을 걸어

혼자만 겨우 지나갈 수 있는 굴속으로 내려간다

김순남 씨 리어카에 빈 박스가 차곡차곡 쌓이는 동안

맨몸으로 돌을 깨는 샬디의 몸에 땀이 흐른다

헐렁한 야전 잠바를 걸치고 계단에 앉아 밥을 먹는

김순남 씨 굽은 등을 비추던 태양은 2시간 뒤

허리를 펼 수 없게 비좁은 마나도 작은 금광 위를 비춘다

자루처럼 늘어지는 흙투성이 샬디의 몸이

뒷걸음으로 돌 자루를 끌고 흙벽을 올라온다

열세 번을 오르내려야 하루 일이 끝난다

먹고 사는 것이 전쟁보다 치열하다는 걸 두 사람은 안다

천막에서 점심을 먹고 다시 굴속으로 내려가는 샬디의 꿈은

금이 든 돌 깨서 집 사고 장가를 가는 것

샬디 앞에는 금맥의 시간이 많이 남아 있다

김순남 씨는 샬디가 꿈꾸는 시간을 다 지나왔다

마나도 야자수 숲이 황금빛으로 물들어 갈 무렵에도

김순남 씨는 전쟁통 뒷골목을 다니면 고물을 줍는다

혼자 먹는 시어 꼬부라진 김치뿐인 늦은 한 끼의 밥에

금 덩어리보다 귀한 시간의 파편이 박혀 있다

내일도 김순남 씨 쪽방은 마나도보다 2시간 일찍 해가 뜰 것이다

 

*인도네시아 술라웨시점에 있는 도시. 작은 금광이 많아 황금의 땅이라고도 함

 

 


 

 

장성혜 시인 / 만리장성

 

 

 만리장성은 어디에나 있죠.  너덜거리는 생활정보지 뒷면에서 찾았다면, 지금처럼 뭘 먹기는 먹어야 하는데, 별로 먹고 싶은 게 생각나지 않는 토요일 오후일 수도 있고, 신발장 구석에서 발견했다면, 열두 번쯤 이삿짐을 쌌다 푸는 중인지도 모르죠. 삼박 사일 코스 여행을 떠올린다면, 구식 냉장고 옆구리에 붙은 만리장성 하고는 거리가 멀 수도 있죠. 한 그릇이라도 정성껏 배달해 준다면, 여기처럼 원룸이나 고시원이 많은 동네일지도 모르죠. 만리장성이 있는 골목 깊숙이 들어가면, 자장면이 30원일 때쯤 태어난 남자가, 와서 먹으면 천 원을 할인해 주는, 옛날짜장을 먹으러 가는 뒷모습이 보일지도 모르죠. 기름때 낀 주방 안에서 볶음밥을 만드는 여자는, 오래전 자장면은 배달하는 남자와 만리장성을 쌓았을 수도 있죠. 채널을 돌리다 다시 다큐멘터리로 돌아오는 토요일, 아프리카 아이의 검은 눈과 마주치죠. 자장면을 기다리는 나를 보고 말하죠. 옥수수죽이라도 실컷 먹고 싶다고, 옥수수죽과 자장면 사이에 만리장성이 보이죠. 물을 길으러 점점 멀리 간다는 아이의 나뭇젓가락 같은 다리에서도, 내가 쓰다가 만 이력서의 숫자에서도 보이죠. 세상에서 가장 맛있는 음식이 자장면이었던 아이가, 그냥 자장면이나 시켜 먹을까 하는 어른으로 불어터져 있는 저녁, 만리장성 위에는 한입 베어먹은 단무지 같은 달이 떠 있죠.

 

 


 

 

장성혜 시인 / 귀향

 

 

온다.

화염병 날아다니는 산동네로

끊긴 전선들 뛰어내린 골목으로

철거민대책위원회 팻말 지나

붉은 스프레이로 해골 그려놓은 벽 넘어

눈알 빠지고 다리 잘린 곰 인형 밟고

 

온다.

도둑고양이 울음소리로

뼈 드러난 만화 대여점 기웃거리며

허리 부러진 구멍가게 지나

결사반대 현수막 너덜거리는 길로

머리카락과 욕설 엉켜 있는 현장으로

 

온다.

쩍 갈라진 시멘트 바닥 사이로

깨진 유리조각 틈을 비집고

말라죽은 뿌리 안고 뒹구는 깨진 화분으로

돌덩어리 된 가슴을 뚫고

비명처럼 풀들이 올라온다.

 

봄이 온다.

 

-「제18회 전태일 문학상 수상 작품집」

 

 


 

장성혜 시인

1957년 경북 봉화에서 출생. 1977년 《강원일보》 신춘문예 시 부문 당선. 2002년 계간 리토피아 신인상, 2010년 제18회 전태일 문학상 시 부문 수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