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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시인과 시(현대)

나호열 시인 / 당신이라는 말 외 4편

by 파스칼바이런 2021. 10. 17.

나호열 시인 / 당신이라는 말

 

 

양산 천성산 노천암 능인 스님은

개에게도 말을 놓지 않는다

스무 첩 밥상을 아낌없이 산객에게 내놓듯이

잡수세요 개에게 공손히 말씀하신다

선방에 앉아 개에게도 불성이 있느냐고

싸우든 말든 쌍욕 앞에 들어붙은 개에게 어서 잡수세요

 

강진 주작산 마루턱 칠십 톤이 넘는 흔들바위는

눈곱만한 받침돌 하나 때문에 흔들릴지언정 구르지 않는다

개에게 공손히 공양을 바치는 마음과

무거운 업보를 홀로 견디고 있는

작은 돌멩이의 마음은 무엇이 다른가

그저 말없이 이름 하나를

심장에서 꺼내어 놓는 밤이다

 

당신

 

ㅡ <계간문예> 2020년 가을호 / 『모던포엠』 2021년 3월호 ‘초대석’

 

 


 

 

나호열 시인 / 흘러갔다

 

 

나는 흘러갔다

낮이나 밤이나

비오는 날이나

바람 부는 날에도

어제의 나는

오늘의 나를 만나지 못하고

영원히 나는 나의 얼굴을 보지 못하고

나는 흘러갔다

촘촘한 세월의 그물을 뚫고

赤貧으로 사라지기 위하여

이렇게 흘러가는 것인가

서럽게 서 있던 역이 흘러갔다

그렇게 완고하게 서 있던 집들과

나무들이 흘러갔다

길이 흘러가고

고통이 흘러갔다

 

문득 흘러갔던 초로의 사나이가

소금기둥으로 서 있다

 

― <시와산문> 2017년 봄호

 

 


 

 

나호열 시인 / 봄날은 간다

 

 

봄날은 간다

폭죽으로 처지는 상처

악보에 걸리는

어지럽고 헛것만 보이는 하늘로

종달새는 날아와 주지 않는다

 

탁자 위에 놓인

아우렐리우스의 참회록

계절을 잊은 채

水菊이 미쳐서 피고

기슭을 잃어버린 파도처럼

말문을 닫고 만개하는 꽃들

 

입을 봉한 붕대가

푸르름까지 동여매고

진압의 무거운 발걸음으로

봄날은 간다

 

 


 

 

나호열 시인 / 폭설

 

 

하늘이 똥을 누신다

무량하게 경전을 기다리는 사람들 위로

몇 날 며칠을 똥을 누신다

거름이다

말씀이다

사람들이 만든 길을 지우고

몇 그루의 장송도 넘어뜨렸다

아우성에도 아랑 곳 없이

부질없는 쇠기둥을 휘게 만들었다

하늘에 방목한 것은 조개, 양 떼, 새털 이름을 가진

구름 뿐,

냄새나지 않는 똥을 누시는 까닭이다

무량하게 사람들의 머리 위로

쏟아져 내린다

아우성치지 마라

말씀의 거름 잘 새겨들어라

 

깊은 어둠에서 눈은 더욱 밝게 뜨이고

순백의 천지는 눈을 더욱 멀게 만든다

 

어둠을 두려워하지 마라

철갑 같은 어둠 속에서 길을 찾아라

 

산은 그럴수록 더욱 우뚝하다

 

― <시인시각> 2007년 겨울호 / 시집 『타인의 슬픔』

 

 


 

 

나호열 시인 / 긴 편지

 

 

風磬을 걸었습니다 눈물이 깨어지는 소리를 듣고 싶었거든요 너무 높이 매달아도 너무 낮게 내려놓아도 소리가 나지 않습니다 바람이 지나가는 길목에 우두커니 오래 있다가 이윽고 아주 오랜 해후처럼 부둥켜 안지 않으면 안 되는 것이지요 와르르 눈물이 깨질 때 그 안에 숨어 있던 씨앗들이 쏟아져 나옵니다 날마다 어디론가 향하는 손금 속으로 사라지는 짧은 그림자 말이지요 너무 서두르고 싶지는 않습니다 조금씩 솟아올라 고이는 샘물처럼 풍경도 슬픔을 제 안에 채워두어야겠지요 바람을 알아버린 탓이겠지요

 

― 시집 『타인의 슬픔』

 

 


 

나호열 시인

1953년 충남 서천에서 출생. 경희대학교 대학원 철학과 박사과정 졸업. 1980년 울림시 동인으로 참여, 【월간문학】 신인상(1986),【시와 시학】 중견시인상(1991)을 받으면서 본격적인 문학활동 시작.   저서로는 『칼과 집』 , 『우리는 서로에게 슬픔의 나무이다』, 『그리움의 저수지엔 물길이 없다』 등 10권의 시집과  사화집 『영혼까지 독도에 산골하고』 등이 있음.  녹색시인상(2004), 한민족문학대상(2007), 한국예총 특별공로상(2007) 한국문협 서울시 문학상(2011) 등을 수상. 현재 경희대학교 사회교육원 교수이며 계간 『시와 산문』 편집위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