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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시인과 시(현대)

강민숙 시인 / 묘지 앞에서 외 6편

by 파스칼바이런 2021. 10. 17.

강민숙 시인 / 묘지 앞에서

-노을 속에 당신을 묻고

 

 

노을 속에 당신을 묻고

한 달 만에

내 잃어버린 사랑을 찾아

산을 오릅니다

 

당신은 그 사이

듬성듬성 잔디풀로 돋아나 있습니다.

 

엎드려 큰절 두 번 올리고

그대로 주저앉은 채

당신께 엉금엉금 안기어 봅니다

 

흙무덤 쥐어뜯으며

흔들어 깨워 보다

당신의 그림자만 안고

내려옵니다.

 

 


 

 

강민숙 시인 / 가슴으로 내리는 눈

 

 

이대로

사위어 가기에는

내 피는

아직도 따뜻한데

 

너는

내 가슴에 빈 발자국만

남긴 채

훌쩍 떠나 버리고

 

이 겨울

타는 가슴위로

눈은 내리고

밤은 자꾸 깊어 가는데

 

네가 없는 이 밤에

그 누가

저 눈발 헤치며 달려와

나를 지켜줄 것인가.

 

 


 

 

강민숙 시인 / 담쟁이덩굴 앞에서

 

 

벽을 다오

나에게

다시는 무너지지 않을

잎새 한 장 기대어 볼

벽 하나 돌려 다오

 

맞바람에

숭숭 뚫려버린 가슴

가누어 갈

벽 하나 내어 다오

 

얽히고 설킨 세상살이

내 어쩌다

밑동째 뽑혀 버리고

타는 입술이어야 하는가

 

담쟁이덩굴처럼

그대 곁에

다시 안기고 싶은데.

 

<문학수첩 / 노을 속에 당신을 묻고·1[하늘이 무너지던 날] / 강민숙>

 

 


 

 

강민숙 시인 / 짐승

 

 

내 가슴에

짐승 한 마리 살고 있다

 

실오라기 하나 걸치지 않은

짐승 한 마리

살고 있다

 

짐승이 벅벅 울어대는 밤이면

행여,

누가 볼까 조바심하여

진통제 한 알 삼키며

가슴 달랜다

 

그대 없는 이 가슴에

불같은 짐승 한 마리 살고 있다.

 

 


 

 

강민숙 시인 / 날개 꺽인 새 한 마리

 

 

내 안에

날개 꺽인 새 한 마리

울고 있어요

 

아무런 곡조도 없이

아무런 사연도 없이

구욱 ― 꾹

 

달랠 수도

보낼 수도 없어

내가 울어버리면

 

울지 않는

새 한 마리

내 가슴팍만 쪼고 있어요.

 

 


 

 

강민숙 시인 / 한 사람이 있다면

 

 

가다

길 물어보면

길 가르쳐 주는 이가

있다면

 

살다

그리울 적이면

달려와 줄

한 사람이 있다면

 

돌아서서

떠난다 해도

내 가슴속에 묻어 둘

그 한 사람이 곁에 있다면

 

행복할 텐데.

 

 


 

 

강민숙 시인 / 바다를 바라보며

 

 

그대 바다에는

바람이 부나요

파도가 치나요

파도보다 더 큰 풍랑이 이나요

 

그대 바다에

섬으로 떠서

노래 부르고 싶어라

 

비바람 폭풍우에

등 깍이며

살아있는 그날까지

그대 이름 부르리라.

 

<문학수첩 / 그대 바다에 섬으로 떠서 [노을 속에 당신을 묻고·1] >

 

 


 

강민숙 시인

전북 부안 출생. 동국대 문예창작학과 석사, 명지대 문예창작학과 문학박사. 1991년 등단해 아동문학상과 허난설헌문학상, 매월당문학상, 서울문학상, 법무부장관상 등을 수상했다. 시집 <노을 속에 당신을 묻고> <그대 바다에 섬으로 떠서>, <꽃은 바람을 탓하지 않는다>, <둥지는 없다> 외 10여권의 저서가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