황상순 시인 / 불량채무자
해마다 꽃을 피우는 것 그 꽃을 바라보는 것 다 무료인 줄 알았다 봄날 아침 한꺼번에 청구서를 받는다 더 이상 공짜는 없다 방구석에 그냥 코 처박혀 있거라 늘리며 사는 게 쉬운 일 아니지만 살림 줄여 사는 것은 더더욱 어려운 법 자가격리 사회적 거리두기 내 생전 처음 겪어보는 낯선 거래다만 살림 거덜나 길바닥에 나앉아도 널 어찌 그냥 보내랴, 삼수갑산 가더라도 꽃구경은 해야겠네 꽃보다 예쁜 봄처녀도 봐야겠네 빚 계속 불어나 파산관재인이 찾아오면 염병할, 다 가져가거라 주저없이 훌훌 몸으로 때우리라.
황상순 시인 / 시인의 바다
태초에 하나님이 지구를 만드셨다
하늘이 온통 까맣다는 걸 오밤중이 되어서야 깨달았다 색깔이 틀렸나봐, 반짝이들을 총총 붙여 데코레이션을 하였다 땅이 너무 누렇다는 것은 텐진산맥 넘어 고비사막을 지나다가 알았다 색깔을 잘못 칠했나봐, 초록으로 덧칠했지만 물감이 부족하다
다행이도, 바다는 더할 나위 없이 색깔이 참 잘 나왔다
보기만 하여도 거나히 취하는 바다 서울서 온 노시인과 서툰 물질에 지친 젊은 과수댁이 해삼 소라안주 앞에 두고 앉아 주거니 받거니 해 질 녘까지 쉬이 일어서지 못하는 성산포 앞바다가 특히 그렇다
황상순 시인 / 오팔팔
청량리 588골목엔 하얀 날개 달린 천사가 있다. 천사를 목격한 사람이 한 둘이 아니다.
두 다리를 잃은 불구자며 돈 없는 군바리며 척 봐도 알 수 있는 무일푼의 가난한 이웃에게, 눈길조차 주지 않는 쭈구렁텅 상노인네에 이르기까지 천사는 아낌없이 자기 몸을 나눠 주곤 했는데 행여 그들이 마음 다칠까봐 천 원이나 이천 원 라면 한 그릇 값은 꼭 받았다고 한다.
재개발로 건물이 철거되기 시작한 이후에도 한동안 자그마한 체구에 유난히 눈이 맑은 그 천사를 보았는데 근처 가나안교회 담장에 개나리꽃이 흐드러진 어느 봄날 지상에서의 잠깐 외출을 마무리하고 곧 헐리게 될 두 평 남짓 작은 방에서 잠자는 듯 조용히 천상으로 복귀하였다고 한다.
엄하기 이를 데 없는 보문사 극락전의 염라대왕조차 행여 늦을세라 버선발로 달려 나와 천상의 문을 활짝 열어 젖혔을 것이라고 은혜 크게 입은 이들이 이구동성 얘길 하는데,
추적추적 봄비 내리는 날이면 지금도 불 꺼진 골목길을 서성대는 가난한 사내들 앞에 환하게 미소 지으며 다가서는 흰 날개의 천사를두 눈으로 똑똑히 본 사람이 또한 한 둘이 아니다.
나도 봤다.
황상순 시인 / 희망, 대한민국
요새 아덜 국수 먹는 거 보면 나라가 참 큰일이다 복스럽게 음식을 먹어야 집안이 잘 되는 법인데 젓가락에 돌돌 말며 저렇게 깨작거리니 들어오던 복도 그만 꽁지 빠지게 도망가고 말것다 복실인지 순실인지 하는 요물 생겨난 게 다 이유가 있는 뱁이여 국수란, 젓가락 깊이 꽂아 넣고 이렇게 - 두고 온 좌판 응시하며 할머니는 그릇에 엎어져 쭈우욱 국수를 빨아 댕긴다 그 힘에 몇 가락은 올라오다 휘어지며 콧등을 쳤는가 말았는가 순식간에 휘이익 입으로 빨려 들어간다 그릇 높이 들어 남은 국물마저 깨끗이 들이키며 꺼억, 복스럽게 점심 드신 후 서둘러 자리에서 일어서신다 우리나라는 아직 저 할머니 때문이라도 희망이 있다.
황상순 시인 / 이스탄불의 물장수
행색을 보니 난민아이가 틀림없다 졸졸 따라오는 그에게 1달러 거금을 손에 쥐어 주었다
앗, 폭격기가 머리 위로 지나갔나 대인지뢰를 누가 땅에 묻어 두었을까 죽순처럼 여기저기 갑자기 솟아난 아이들이 앞을 가로막고 나도 나도, 악머구리 소리를 내며 다투어 손을 내민다 그래 알았다, 자 자 하나씩 서역 멀리 이스탄불의 종로 뒷골목 알량한 공정정책을 펴고 큰길을 나서니 댕댕댕댕 전차가 지나간다
맞아, 저 소리야 *새벽마다 고요히 꿈길을 밟고 와 머리맡에 솨아 찬물을 퍼붓고 사라지는 북청물장수 밤마다 천리 길 고향집 다녀오는 상처투성이 발이라도 흠뻑 적셔주면 좋으련만
아흐아 우어우어 아슈아드 알라 해이야 알랏쌀라 우어우어 - 이 소리가 맞을 거야
새벽아잔 소리에 눈 비비며 일어난 천년 모스크사원의 뼈 앙상한 네 기둥이 앞서거니 뒤서거니 물지게를 지고 피에르 롯티 언덕을 오른다 비뚤비뚤 써내려가는 낯선 글자 위에 제주 한라산 중턱에서 담아온 생수 한 병 서둘러 콸콸 쏟아 붓는다.
* 김동환의 ‘북청물장수’ 중
황상순 시인 / 꽃 무릎
혹, 꽃 무릎을 아시는지?
꽃에도 무릎이 있다길래 찾아보았더니 절 한 채를 다 삼킨 짙은 안개 속에 묻혔는지 어느 구석에도 꽃의 무릎은 보이지 않더군
무릎이 아니라 무릅인가?
사방팔방 구석구석 꽃 무릅을 찾아보았으나 가시나무 솟대 위에 새처럼 앉아 있는 두릅나물밖에 없더군
맞아 맞아, 꽃이 무슨 다리가 있으랴 무릎이 필요하랴 무릇 죄 많은 것들이 무릎을 꿇고 손을 비비는 것 무릎으로 기며 기며 엄한 세상 살아가는 것
가을 날 불갑사에 와서 알았네 난 또 불갑사에 불이 난 줄로 착각했네 빨간 화염 솟구치는 저 꽃들 이름이
꽃 무릎이 아니라 꽃 무릅이 아니라 꽃무릇!
혹, 그대는 불갑사 일주문 밖에서 인간들보다 앞서 무릎 꿇고 활활 제 몸 태워 불바다를 이루는 꽃
꽃무릇의 무릎을 보았는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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