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선향 시인 / 곰국을 끓이는 동안
석양은 쪽창문 틈새로 부엌을 자꾸 기웃거리고
엄마, 저 솥 안에 정말 곰이 들어 있어요? 네? 까르륵-
남편은 틈만 나면 전화해 지금 어디야?
눈이 반쯤 감긴 시어머닌 현관문을 지키고 참을성 없는 애인은 러브호텔을 떠나고
몇 시간째야 도대체 이렇게 지키고 서 있는 게
나는 웃어야 할까 울어야 할까 끓어오르는 곰국을 뒤집어엎고 애인의 발목을 붙잡으러 뛰쳐나갈까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고 아이섀도우와 땀은 범벅이 되고
오밤중에 되어서야 졸린 눈을 끔벅이며 솥뚜껑을 열어 보니 곰국은 한 국자도 남아 있지 않고 (심지어 말끔한 밑바닥은 송곳니처럼 번쩍거리기까지 하고)
- 『여자의 정면』, 실천문학사, 2016
김선향 시인 / 반려(伴侶)
라오스 방비엥 블루 라군으로 가는 비포장도로 한복판을 흰 어미소와 점박이 송아지 그리고 까만 염소, 껑충하고 비쩍 마른 닭 일가가 느릿느릿 건넌다 사람들은 운전을 멈추고 경적을 울리지도 않고 무작정 기다린다
김선향 시인 / 나의 거처
너는 고산지대에 핀 말나리꽃의 줄기다
빈집 절구독에 고인 빗물에 비치는 낮달이다
붙박이별을 이정표 삼아 비탈길을 가는 나귀 걸음걸이다
너는 무명천에 물들인 쪽빛이다
노인정 앞 평상에 내려앉은 후박나무 잎사귀다
김선향 시인 / 0.2초
고인 침을 모아 알약 한 개를 삼키는 시간
회전목마를 타고 있는 딸을 버리고 엄마가 사라지는 시간
파도가 집 한 채를 잡아먹는 시간
잠복한 형사에게 불법체류자의 꼬리가 밟히는 시간
골프채를 휘둘러 창문을 깨부수고 도주하는 시간
범퍼에 부딪힌 고라니가 허공으로 솟구쳤다 떨어지는 시간
차안(此岸)에서 피안(彼岸)으로 넘어가는 시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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