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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시인과 시(현대)

김선향 시인 / 곰국을 끓이는 동안 외 3편

by 파스칼바이런 2021. 10. 19.

김선향 시인 / 곰국을 끓이는 동안

 

 

석양은 쪽창문 틈새로 부엌을

자꾸 기웃거리고

 

엄마, 저 솥 안에 정말 곰이 들어 있어요? 네?

까르륵-

 

남편은 틈만 나면 전화해

지금 어디야?

 

눈이 반쯤 감긴 시어머닌 현관문을 지키고

참을성 없는 애인은 러브호텔을 떠나고

 

몇 시간째야 도대체

이렇게 지키고 서 있는 게

 

나는 웃어야 할까 울어야 할까

끓어오르는 곰국을 뒤집어엎고

애인의 발목을 붙잡으러 뛰쳐나갈까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고

아이섀도우와 땀은 범벅이 되고

 

오밤중에 되어서야 졸린 눈을 끔벅이며 솥뚜껑을 열어 보니

곰국은 한 국자도 남아 있지 않고

(심지어 말끔한 밑바닥은 송곳니처럼 번쩍거리기까지 하고)

 

- 『여자의 정면』, 실천문학사, 2016

 

 


 

 

김선향 시인 / 반려(伴侶)

 

 

라오스 방비엥 블루 라군으로 가는

비포장도로 한복판을

흰 어미소와 점박이 송아지

그리고 까만 염소,

껑충하고 비쩍 마른 닭 일가가

느릿느릿 건넌다

사람들은 운전을 멈추고

경적을 울리지도 않고

무작정 기다린다

 

 


 

 

김선향 시인 / 나의 거처

 

 

너는 고산지대에 핀 말나리꽃의 줄기다

 

빈집 절구독에 고인 빗물에 비치는 낮달이다

 

붙박이별을 이정표 삼아 비탈길을 가는 나귀 걸음걸이다

 

너는 무명천에 물들인 쪽빛이다

 

노인정 앞 평상에 내려앉은 후박나무 잎사귀다

 

 


 

 

김선향 시인 / 0.2초

 

 

고인 침을 모아 알약 한 개를 삼키는 시간

 

회전목마를 타고 있는 딸을 버리고 엄마가 사라지는 시간

 

파도가 집 한 채를 잡아먹는 시간

 

잠복한 형사에게 불법체류자의 꼬리가 밟히는 시간

 

골프채를 휘둘러 창문을 깨부수고 도주하는 시간

 

범퍼에 부딪힌 고라니가 허공으로 솟구쳤다 떨어지는 시간

 

차안(此岸)에서 피안(彼岸)으로 넘어가는 시간

 

 


 

김선향 시인

충남 논산 출생. 충남대학교 국문과와 同 대학원 졸업. 2005년 《실천문학》 신인상으로 등단. 시집으로 『여자의 정면』『F등급 영화』이 있음. 2015년 서울문화재단 창작지원금을 수혜. 2019년 경기문화재단 유망·우수작가 작품집으로 『멀리 도망칠수록 서로를 닮아가는』이 있음. 현재 <사월> 동인으로 활동 중.