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소원 시인 / 어느 날
아침에 일어났는데 문득 목소리가 안 나옵니다 멀쩡하던 목소리가 안 나옵니다
어젯밤 꿈속에서만 얼굴 보는 형제를 만났습니다
갑자기 너무 많은 이야기를 한 탓일까 오후가 되어도 목소리가 안 나옵니다
나는 꿈속에서만 얼굴 보는 사람이 있습니다
나에게는 캄캄한 곳에서만 주고받는 말들이 있습니다
나는 어둠속에서만 기어이 잡는 손이 있습니다
내 말들은 깊은 어둠속에서만 황홀히 드러났다 이내 사라집니다
박소원 시인 / 카리카손의 밤에 쓴 엽서
이곳에서는 내 식으로 창을 낼깨요
당신과 나 단둘이
남향(南向)의 방 하나씩 차지 하지요
북향(北向)에 작은 벽난로를 두고 장작하나씩 집어넣어 우리의 화기(火氣)를 조절해요 안락의자 두 개 놓인 거실에는 커튼도 달지 않을래요
잠든 시간 깨어 있는 시간 구분하지 말고 정원의 새 소리를 들어요
아프게 서로 짓찧었던 부위마다 붉은 약 발라주며 미안하다 후후 서로 용서 하기로 해요
한 사람이 죽으면 다른 한 사람이 나중 죽을때까지
소식(小食)하는 당신 식성을 따라 채식(菜食)으로 아침을 차릴깨요
천천히 그렇게 손 잡고 마침내는 함께 죽어요
중천에 환하게 뜬 달 마당 한가운데 연못에 걸려 멈추어 있는 이곳은 프랑스 남부의 카리카손이예요
소박하지만 예의가 바른 뭇 사람들이 돕고 사는 마을
따사로운 햇빛 한 오라기 어깨에 걸치고 바람소리 환하게 들리는 우리의 출생지(出生地)같은 이 마을 곳 곳 동네 길을 다 걸어서
길 끝까지 걸어서 마을 뒷길 수많은 텃밭 중 가장 경사진 땅 몇 평쯤 세를 얻을깨요
두렁마다 종(種)을 바꾸어 씨를 뿌려요 치커리,당근, 방울토마토 상추,열무,배추따위를 절기에 따라 푸릇 푸릇 솎아 내는 일
새벽잠 줄이고 뒤늦은 농사법 천천히 배워갈까요?
나의 초대를 곧, 수락해 주세요
이 엽서를 받을 수 있는 주소를 부디, 내게 보내주세요
박소원 시인 / 아무르 강가에서
여기는 두 개의 시계가 있다 너는 북쪽의 시계를 나는 남쪽의 시계를 본다 흐린 강물을 따라 철새를 따라 시간들 습지의 향을 맡으며 사라질 때 우리는 눈을 감고 휘파람을 불었다
새들의 합창소리를 흉내 내며 너의 휘파람소리는 두 도시의 거리만큼 나의 휘파람을 앞서가고 조율을 맞춘 피아노 건반처럼 음표들은 붉은 허공에 박혀 울고
낮은 언덕을 오르면 강물은 무덤이 되었다 너와 나 사이에는 언제나 같은 음이 반복되고 먼 곳에서 나는 더 먼 곳에서 표류하는 죽음을 생각한다
새들은 죽은 곳에서 울면서 태어나고 우리의 결별에는 아무런 이유가 없는 것이다 북쪽은 북쪽의 나침반이 흔들리고 남쪽은 남쪽의 나침판이 돌고 우리의 슬픔에는 계절이 없는 것이다
박소원 시인 / 어떤 추억
할아버지는 큰 아들인 내 아버지를 낳고 터 넓은 밭에 유실수를 심기 시작하셨단다 학교에 입학 할 때마다 한 그루씩 군 입대를 할 때에도 심지어 어머니와 혼인을 한 해에도 종이 다른 감나무를 심으셨단다 유년시절 터 넓은 밭에는 죽은 큰 오빠와 죽은 두 언니를 낳던 해에 심은 감나무도 해를 걸러 풍작이 들곤 했다 대곡시, 광주골감, 봉화골감, 꾸리감, 평핵무, 개월하시, 품종도 다양한 감나무들 웬일인지 나무와 나무 사이가 좁혀질수록 아버지는 더욱 집 밖으로 돌고 할아버지의 긴 한숨은 깊어졌다 할아버지 갑자기 숨 놓으실 때, 기다렸다는 듯이 집 밖에서 집터랑 한 묶음으로 밭문서를 넘긴 아버지 그 해 가을도 못 넘기고 풋감 주렁주렁 매단 채 감나무들 뿌리 채 뽑혀 나가는 것을 나는 보았다 내 감나무가 나무더미 밑에서 식은 땀 흘리는 것을 나는 온종일 본 적이 있다.
박소원 시인 / 푸른 뿌리-양파
뿌리 뽑히는 순간 이미 중심을 잃었다 베란다 한 귀퉁이에 걸려서도 중심 없는 나는 잘 지낸다 겨울 햇볕에 뿌리를 건조시키며 나는 정말 잘 지낸다 잘 썩고 있다 몸속으로 꺾어 들어오는 햇빛들 내 장기 곳곳을 누비고 휴식도 없이 순회한다 희망은 오전에서 오후로 넘어간다 제 주기를 넘기는 각각의 시간들 한 스푼씩 떠먹으며 겹겹이 투명한 몸을 문지르며 깎으며 나는 본다 갈수록 진물이 흐르는 목숨을 갈수록 징그러운 벌레들이 몰려드는 내일을 썩은 몸이 텅텅 비어 먼지가 일 때까지 매운 성깔을 망 밖으로 몰아내며 자꾸만 돋아나는 푸른 싹들을 나는 본다 남은 내 목숨들 모두 내놓으면 너, 내 새로운 뿌리가 되어 줄래* 내가 몸 밖 나에게 가만가만 묻는 것이다 나처럼 썩어 뭉개지는 미래가 자꾸만 보이지만......, 죽음 다음의 생에게 한 걸음 길을 놓는다
*김충규의 시 '내 고양이는 지금 어느 골목에 있을까'패러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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