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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시인과 시(현대)

박소원 시인 / 어느 날 외 4편

by 파스칼바이런 2021. 10. 19.

박소원 시인 / 어느 날

 

 

아침에 일어났는데

문득

목소리가 안 나옵니다

멀쩡하던 목소리가 안 나옵니다

 

어젯밤 꿈속에서만 얼굴 보는

형제를 만났습니다

 

갑자기 너무 많은 이야기를 한 탓일까

오후가 되어도 목소리가 안 나옵니다

 

나는 꿈속에서만

얼굴 보는 사람이 있습니다

 

나에게는

캄캄한 곳에서만

주고받는 말들이 있습니다

 

나는 어둠속에서만

기어이 잡는 손이 있습니다

 

내 말들은

깊은 어둠속에서만

황홀히 드러났다 이내 사라집니다

 

 


 

 

박소원 시인 / 카리카손의 밤에 쓴 엽서

 

 

이곳에서는

내 식으로

창을 낼깨요

 

당신과 나

단둘이

 

남향(南向)의

방 하나씩

차지 하지요

 

북향(北向)에

작은 벽난로를 두고

장작하나씩

집어넣어

우리의 화기(火氣)를 조절해요

안락의자 두 개 놓인

거실에는

커튼도 달지 않을래요

 

잠든 시간

깨어 있는 시간

구분하지 말고

정원의 새 소리를 들어요

 

아프게 서로

짓찧었던 부위마다

붉은 약 발라주며

미안하다

후후 서로 용서

하기로 해요

 

한 사람이

죽으면

다른 한 사람이

나중

죽을때까지

 

소식(小食)하는

당신 식성을 따라

채식(菜食)으로

아침을 차릴깨요

 

천천히 그렇게

손 잡고

마침내는 함께 죽어요

 

중천에

환하게 뜬 달

마당 한가운데

연못에 걸려

멈추어 있는

이곳은

프랑스 남부의

카리카손이예요

 

소박하지만

예의가 바른

뭇 사람들이

돕고 사는 마을

 

따사로운 햇빛 한 오라기

어깨에 걸치고

바람소리

환하게 들리는

우리의 출생지(出生地)같은

이 마을 곳 곳

동네 길을 다 걸어서

 

길 끝까지 걸어서

마을 뒷길

수많은 텃밭 중

가장 경사진 땅 몇 평쯤

세를 얻을깨요

 

두렁마다

종(種)을 바꾸어

씨를 뿌려요

치커리,당근, 방울토마토

상추,열무,배추따위를

절기에 따라

푸릇 푸릇

솎아 내는 일

 

새벽잠 줄이고

뒤늦은 농사법

천천히 배워갈까요?

 

나의 초대를

곧, 수락해 주세요

 

이 엽서를

받을 수 있는

주소를

부디, 내게 보내주세요

 

 


 

 

박소원 시인 / 아무르 강가에서

 

 

여기는 두 개의 시계가 있다

너는 북쪽의 시계를 나는 남쪽의 시계를 본다

흐린 강물을 따라 철새를 따라

시간들 습지의 향을 맡으며 사라질 때

우리는 눈을 감고 휘파람을 불었다

 

새들의 합창소리를 흉내 내며

너의 휘파람소리는

두 도시의 거리만큼 나의 휘파람을 앞서가고

조율을 맞춘 피아노 건반처럼

음표들은 붉은 허공에 박혀 울고

 

낮은 언덕을 오르면

강물은 무덤이 되었다

너와 나 사이에는 언제나 같은 음이 반복되고

먼 곳에서 나는

더 먼 곳에서 표류하는 죽음을 생각한다

 

새들은 죽은 곳에서 울면서 태어나고

우리의 결별에는 아무런 이유가 없는 것이다

북쪽은 북쪽의 나침반이 흔들리고

남쪽은 남쪽의 나침판이 돌고

우리의 슬픔에는 계절이 없는 것이다

 

 


 

 

박소원 시인 / 어떤 추억

 

 

할아버지는 큰 아들인 내 아버지를 낳고 터 넓은 밭에 유실수를 심기 시작하셨단다 학교에 입학 할 때마다 한 그루씩 군 입대를 할 때에도 심지어 어머니와 혼인을 한 해에도 종이 다른 감나무를 심으셨단다 유년시절 터 넓은 밭에는 죽은 큰 오빠와 죽은 두 언니를 낳던 해에 심은 감나무도 해를 걸러 풍작이 들곤 했다 대곡시, 광주골감, 봉화골감, 꾸리감, 평핵무, 개월하시, 품종도 다양한 감나무들 웬일인지 나무와 나무 사이가 좁혀질수록 아버지는 더욱 집 밖으로 돌고 할아버지의 긴 한숨은 깊어졌다 할아버지 갑자기 숨 놓으실 때, 기다렸다는 듯이 집 밖에서 집터랑 한 묶음으로 밭문서를 넘긴 아버지 그 해 가을도 못 넘기고 풋감 주렁주렁 매단 채 감나무들 뿌리 채 뽑혀 나가는 것을 나는 보았다 내 감나무가 나무더미 밑에서 식은 땀 흘리는 것을 나는 온종일 본 적이 있다.

 

 


 

 

박소원 시인 / 푸른 뿌리-양파

 

 

뿌리 뽑히는 순간 이미 중심을 잃었다

베란다 한 귀퉁이에 걸려서도

중심 없는 나는 잘 지낸다

겨울 햇볕에 뿌리를 건조시키며

나는 정말 잘 지낸다 잘 썩고 있다

몸속으로 꺾어 들어오는 햇빛들

내 장기 곳곳을 누비고 휴식도 없이 순회한다

희망은 오전에서 오후로 넘어간다

제 주기를 넘기는 각각의 시간들

한 스푼씩 떠먹으며 겹겹이 투명한 몸을

문지르며 깎으며 나는 본다

갈수록 진물이 흐르는 목숨을

갈수록 징그러운 벌레들이 몰려드는 내일을

썩은 몸이 텅텅 비어 먼지가 일 때까지

매운 성깔을 망 밖으로 몰아내며

자꾸만 돋아나는 푸른 싹들을 나는 본다

남은 내 목숨들 모두 내놓으면

너, 내 새로운 뿌리가 되어 줄래*

내가 몸 밖 나에게 가만가만 묻는 것이다

나처럼 썩어 뭉개지는 미래가

자꾸만 보이지만......,

죽음 다음의 생에게 한 걸음 길을 놓는다

 

*김충규의 시 '내 고양이는 지금 어느 골목에 있을까'패러디

 

 


 

박소원 시인

1963년 전남 화순에서 출생. 서울예술대학교 문예창작과 졸업. 단국대 대학원 수료. 2004년 《문학.선》 매미 외 4편이 당선되어 등단. 시집으로 『슬픔만큼 따뜻한 기억이 있을까』『취호공원에서 쓴 엽서』가 있음. 2012년 경기문화재단과 한국문화예술위원회 창작기금 수혜. 현재 단국대 대학원 문예창작과 박사과정 재학 中. '빈터' 동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