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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시인과 시(현대)

허수경 시인 / 왜 지나간 일을 생각하면 외 7편

by 파스칼바이런 2021. 10. 19.

허수경 시인 / 왜 지나간 일을 생각하면

 

 

왜 지나간 일을 생각하면 꿈 같은가 현세의

거친 들에서 그리 예쁜 일이라니

 

나 돌이켜 가고 싶진 않았다네 진저리치며

악을 쓰며 가라 아주 가버리라 바둥거리며

그러나 다정의 화냥을 다해

온전히 미쳐 날뛰었던 날들에 대한 그리움

등꽃 재재거리던 그 밤 폭풍우의 밤을 향해

 

나 시간과 몸을 다해 기어가네 왜 지나간 일은

지나갈 일을 고행케 하는가 왜 암암절벽 시커먼

바위 그늘 예쁜 건 당신인가 당신뿐인가

 

인왕제색커든 아주 가버려 꿈 같지도 않게

가버릴 수 있을까, 왜 지나간 일을 생각하면

내 몸이 마음처럼 아픈가

 

 


 

 

허수경 시인 / 사랑의 불선(不善)

 

 

너는 왜 胃가 아프니 마음이 아프지 않고

그래서 이렇게 묻잖아 약은 먹니 술은 안 마시니 지워진

길도 길이니 얼굴이 아플 때도 있니 너 누구에게 맞았니!

 

그래서 돌아본다 조용필이나 고르며 일테면 나는 물고기

비늘 많은 물고기 가시 많은 물고기 가거도에 가면 멸치를

잡을 수 있을까요

 

마음끼리 헤어지기 싫어할 때 견딜 수 없는 몸은 마음으

로 들어온다 에이 바보같이 에이,

마음의 두께 마음의 다리 마음의 팔이 몸을 안는다

 

약은 먹니 그래그래 너는 아가리의 심연을 아니

근데 왜 바보같이 맞기만 했을까

몸의 마음이 너를 때렸니 가기 위해

돌아오기 위해?

허랑허랑......

 

 


 

 

허수경 시인 / 정처없는 건들거림이여

 

 

저 풀들이 저 나무잎들이 건들거린다

더불어 바람도

바람도 건들거리며 정처없이

또 어디론가를......

 

넌 이미 봄을 살았더냐

다 받아내며 아픈 저 정처없는 건들거림

 

난 이미 불량해서 휘파람 휘익

까딱거리며 내 접면인 세계도 이미 불량해서 휘이익

 

미간을 오므려 가늘게 저 해는 가늘고

비춰내는 것들도 이미 둥글게 가늘어져

 

둥글게 휜 길에서 불량하게

아픈 저 정처없는 건들거림

더불어 바람도

또 어디론가를......

 

 


 

 

허수경 시인 / 몽골리안 텐트

 

 

숨 죽여 기다린다

 

숨죽여, 이제 너에게마저

내가 너를 기다리고 있다는 기척을 내지 않을 것이다

 

버림받은 마음으로 흐느끼던 날들이 지나가고

 

겹겹한 산에

물 흐른다

 

그 안에 한사람, 정막처럼 앉아

붉은 텔레비전을 본다

 

 


 

 

허수경 시인 / 불취불귀(不醉不歸)

 

 

어느 해 봄 그늘 술자리였던가

그때 햇살이 쏟아졌던가

와르르 무너지며 햇살 아래 헝클어져 있었던가 아닌가

다만 마음을 놓아 보낸 기억은 없다

 

마음들끼리는 서로 마주 보았던가 아니었는가

팔 없이 안을 수 있는 것이 있어

너를 안았던가

너는 경계 없는 봄 그늘이었는가

 

마음은 길을 잃고

저 혼자

몽생취사하길 바랐으나

가는 것이 문제였던가, 그래서

갔던 길마저 헝클어뜨리며 왔는가 마음아

 

나 마음을 보내지 않았다

더는 취하지 않아

갈 수도 올 수도 없는 길이

날 묶어

더 이상 안녕하기를 원하지도 않았으나

더 이상 안녕하지도 않았다

봄 그늘 아래 얼굴을 묻고

나 울었던가

울기를 그만두고 다시 걸었던가

나 마음을 놓아 보낸 기억만 없다

 

 


 

 

허수경 시인 / 늙은 가수

"뽕짝의 꿈"

 

 

나 오래 전 병아리를 키웠다네

이 놈이 닭이 되면 내버리려고

다 되면 버리는 재미

그게 바로 남창 아닌가, 아무데서나 무너져내리는 거

 

반짝이는 거

반짝이면서 슬픈 거

현 없이도 우는 거

인생을 너무 일찍 누설하여 시시쿠나

 

그게 바로 창녀 아닌가, 제 갈 길 너무 빤해 우는 거

 

닭은 왜 키우나 내버리려고

꽃은 피면 왜 다리를 벌리나 꽃에겐 씨앗의

꿈이란 없다네 아름다움에

뭐, 꿈이 있을 턱이

 

돌아오고 싶니? 내 노래야

내 목젖이 꽃잎 열 듯 발개지던 그 시절

노래야, 시간 있니? 다시 돌아올 시간,

나 어느 모퉁이에서 운다네

나 버려진 거 같아 나한테마저도......

 

내일의 노래란 있는 것인가

정처없이 물으며 나 운다네

 

 


 

 

허수경 시인 / 빈 얼굴만 지닌 노인들만

 

 

빈 얼굴을 지민 노인들만 지나다니는 길옆에 그 극장이 있었다. 흰수건을 쓴 처녀들이 소리없이 극장 옆으로 걸어가는 것을 보았다. 처녀들은 가슴에 달을 달았다. 처녀들은 달을 안고 극장으로 들어갔다. 달이 품안에서 깨기도 전에 극장 안에 있는 환풍기는 붉은 햇빛을 끌고 들어왔다 처녀들은 누런 달을 품고 잠으로 들어갔다 그렇게 나무에는 달 같은 얼굴이 열렸다 그 얼굴은 너무나 낡아 나무는 그만 얼굴을 놓아버리고 싶다 그해 나무들이 그렇게 불편해하는 것도 모르고 도시락과 물병을 들고 우리는 숲으로 들어갔다. 숲은 꼭 그 극장 같았다. 몇백 년 전에 일어난 살인 사건을 매일 매일 무대에 올리던 그 극장, 살해된 자가 매일 매일 그렇게 다시 살해되던 그 극장, 그 숲에서 아이들이 자지러지게 노는 것을 보았다. 물병에 붉은 햇빛이 고이는 것을 보았다 아이들이 그렇게 빨리 자라는 것을 보았다 그리고 빈 얼굴을 지닌 노인들이 배우였다는 것을 깨닫는 순간 처녀들은 슬금슬금 잠에서 깨어나서는 머리수건을 벗었다. 처녀들은 매일 매일 무대에서 살해되는 배우의 얼굴을 하고 있었다

 

 


 

 

허수경 시인 / 기억하는가 기억하는가

 

 

못에 연분홍 푸른 빛 연밥이 열린 거, 연밥 따던 아씨들이 그 못가에 있던 거

못 위를 지나가던 바람이 붉은 빛이거나 누런 빛이거나 하던 거

그 위를 검거나 퍼렇거나 한 입성을 걸치고 죽은 이들이 걸어 다니던 거

걸어 다니면서 연밥 따던 아씨들을 안으려다가 허연 물빛에 스려지던 거

그래서 물이 검거나 푸르거나 허옇거나 하던 거

그 물 위를 불을 인 잠자리들이 날아 다니며 갈 그림자 던지곤 하던 거

 

 


 

허수경(許秀卿) 시인

1964년 경남 진주에서 출생. 경상대학교 국어국문학과 졸업. 1987년 《실천문학》복간호에 시가 실리면서 등단. 시집으로 『슬픔만한 거름이 어디 있으랴』, 『혼자 가는 먼 집』, 『내 영혼은 오래되었으나』 등과 수필집 『길모퉁이의 중국식당』 그리고 번역서 『끝없는 이야기』가 있음. 2?001년 동서문학상, 2016년 전숙희문학상과 '제15회 이육사문학상' 수상. 〈21세기 전망〉 동인으로 활동. 2018년 10월 3일 위암투병 중 별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