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정원 시인 / 벙커
시계 반대 방향으로 어둠이 지나갔다 어둠의 보폭은 한 뼘, 두 뼘 조금씩 환해지는 것 벽을 짚고 헤드폰을 쓰고 우리는 흙의 자세로 바닥에 누워 석류가 터지는 소리를 기록했다 비밀이 있던 자리에 빛을 침투시키면 백 개의 물이 금빛으로 흘러갔다 흑연을 껴안고 서있는 시간의 기둥 지우개밥보다 가볍게 흩어지는 죽은 약속의 입자들 사과 꽃은 벽 속에서 말문이 트였다 옹알이에서 나온 첫 말, 눈부셔 캄캄한 에코로 집을 지으며 빗소리도 들었지만 곤충도 절지동물도 자라지 않았다 천장은 낮고 전깃줄은 스물두 개 입구와 출구를 찾는 법은 햇빛 냄새를 따라가는 것 녹슨 자물쇠를 더듬으며 나비를 풀어주고 어둠보다 더 어두운 그림자를 밟으며 우리는 새벽까지 수맥을 따라갔다 바닥은 빛을 다 드러냈다
한정원 시인 / 펜혹
손가락은 글자를 좋아하는 인문주의자
굳은살이 박힌 검지와 중지를 따라가면 손가락은 놀란 눈을 깜박이며 한밤중 키보드 위에 달라붙어 있다 키보드의 기원은 펜혹이 피어있는 손가락
나는 글자를 짊어지고 언어를 건너가는 낙타 손가락에는 백 년 동안 천 개의 마디를 건너온 밤을 새우며 글씨의 뿌리를 내린 단단한 혹이 자란다 쌍봉낙타의 물주머니이거나 지방질의 저장고이거나 나는 손가락에 단봉을 달고 글자를 저장하고 싶은 사람 편백나무의 살갗을 팔꿈치에 대고 뜨거운 탄광의 밑바닥까지 기어간 적이 있는
며칠을 글 한줄 못쓰고 동굴 속에서 뒤척일 때 손가락 굳은살에서 피맺힌 문장을 한 줄 한 줄 빼어다 쓰는 손가락의 심장에는 앞으로 울어야할 천 편의 시가 웅크리고 있다 발바닥에 박힌 티눈마저도 나를 굴리고 가는 바퀴의 기원이라고 믿는다
손가락은 발바닥의 웅덩이에 손목을 담그고 선인장이 피어나는 달빛 아래서 더 단단해진다 온 몸에 물렁한 혹과 거미줄을 키우며 밤마다 하나씩 천적을 잘라먹는 책상 위의 초록빛 왕사마귀
시집 『석류가 터지는 소리를 기록했다』(천년의시작, 2021 중에서
한정원 시인 / 창백한 푸른 점
바람이 사흘 동안 서북쪽으로 불고 있다 비스킷처럼 부서지는 햇빛의 분말 고요가 말줄임표를 찍으며 낮게 가라앉는다
권태는 시간이 나에게 가하는 복수 어둠에 핀을 꽂으며 다가오는 새와 물고기는 같은 종(種)이라고 말하는 너에게 나는 물고기가 되어 거실에서 베란다로 유영한다
보이저 1호가 보내온 사진*
숲으로 가는 길에 뿌린 빵가루가 까맣게 변색되고 유통기한을 지키려던 통조림이 진공으로 불룩해진 날짜를 들이민다 십 리터의 물을 마시려고 무릎을 꿇고 입을 벌린 나를 믿고 싶지 않다 두 가지 기억이 이어지지 않아 더듬거리는 혀의 갈증 의미 없이 리듬만 타는 문장들 백 페이지의 악보가 티끌로 사라지는 날들의 후기
간식으로 챙겨 넣은 석류 즙을 종점에 와서 마시고 이어폰을 돌돌 말아 주머니에 넣으면 소리 내지 못한 두 눈이 모자이크 뒤에 숨는다
가끔 국제 어두운 밤하늘 협회에서 보내오는 섬 한 채를 띄우고 길을 잃은 일행은 불을 밝힌다 꽃의 노래는 많으니 따가운 가시의 노래를 부르자고 새가 종잇장처럼 떨어지는 명왕성 사진의 뒷면 꽃의 역사는 쉬우니 어려운 뿌리로 얘기하자고
보이저 1호가 비가 온다고 말하면
창밖을 내다볼 것이다 눈물 한 방울 눈썹에 매달고 창문을 기웃거리는 푸른 나비들의 더듬이
죽은 사람도 바람결에 머리칼을 날리는 구름 아래 내가 소홀히 보낸 하루하루가 꽃잎으로 물들다가 흡묵지 아래서 순해진다 창백하게 파랗게 혹은 까맣게
* 칼 세이건(Carl Sagan) 작, 『Pale Blue Dot』
시집 『석류가 터지는 소리를 기록했다』(천년의시작, 2021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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