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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시인과 시(현대)

문효치 시인 / 고요 외 8편

by 파스칼바이런 2021. 10. 20.

문효치 시인 / 고요

 

 

오동꽃에

앉아오시는

저 푸른 그늘을

 

어찌 간수해야 할지

 

나무 위에 머물다가

시나브로 흘러내리는

저 푸른 하늘을

 

어찌 받아 안아야 할지

 

『어이할까』현대시학 기획시인선2, 2019

 

 


 

 

문효치 시인 / 노랑어리연꽃

 

 

푸른 하늘 깊게 들이마시고

문득 내려다보니

저 물 위에 노란별이 내려와 계신다

몇 억 광년은 족히 되었을 여정

우주의 어느 동네에서 내려오시느라

피곤도 했겠지만

간밤에 잠도 잘 주무셨는지

오늘 한낮 얼굴도 맑다

 

 


 

 

문효치 시인 / 별박이자나방

 

 

등에

외계로 가는 길이 보인다

피타고라스가 걷던 길에

에너지가 모여들어

거대한 별들의 숲이 자라고

우리의 삶이 하늘로 이어진다

이 길에서 권력이 나온다

하늘의 입구에 백로자리가 날개를 펄럭인다

우주의 축이 수직으로 일어선다

 

 


 

 

문효치 시인 / 왕귀뚜라미

 

 

머리 위로 억 광년쯤의 거리

거기에서 떠돌던 소리 한 점

그녀의 방 시렁 밑을 지나

내 귀에 들어와

집을 짓고 있네

소리의 몸에 붙어 있는

수많은 별빛들

여기에 와서 마을을 이루고 있네

귓속에 우거진 푸른 풀덤불

풀덤불 속에

물 좋은 귀신 들어오고 있네

 

 


 

 

문효치 시인 / 번개오색나비

 

 

내 깊은 잠 속에

그대가 만들어 놓은 하얀 길

벼락 맞아 죽어가던 대추나무

뽀도시 살아나 잎 피우고 있네

 

 


 

 

문효치 시인 / 층층이꽃

 

 

집을 짓는다면

몇 층짜리 집을 지을까

3층? 5층?

한 층은 새[鳥]를 들이고

한 층은 구름 들이고

또 한 층은 달도 들이고

나는 그 중 어느 층에 들까

바람의 살 속에

집을 짓는다

바람 따라 집도 함께 사라지면

또 새로 오는 바람 속에

집을 짓는다

 

 


 

 

문효치 시인 / 미륵사 터의 탑

 

 

옥개석에 누워

잠자던 세월이 내려온다.

용화산 소나무

목숨의 한 끝 다쳐

앓고 일어나는데

구겨져 날아다니던 햇빛들

이제는 저 들 끝으로 모도 가버리고

텅 비어 적이 안심되는 평화

요 무언의 땅바닥,

미륵의 세상인가

 

 


 

 

문효치 시인 / 백제시- 법륭사 석가삼존상

 

 

부처님 생각 속에

문득 잠자리 한 마리 날아든다

유년의 우물가 풀대 끝에 앉아

첫 가을의 햇살에 몸을 말리며

나름대로 삶을 번민하던

잠자리 한 마리 들어와

부처님의 생각에 파문을 짓는다

부처님, 한 번 일어났다 앉는다

투웅

앉는 소리가 금당의 천장을 울린다

법고, 범종, 목탁, 풍경, 운판, 목어

덩덩 트엉 딱딱 캥캥 챙챙 토드락토드락

이것들 한꺼번에 일어서서 고함 고함이다

문득 잠자리 한 마리

내 생각 속에 날아든다

 

 


 

 

문효치 시인 / 백제시 - 구다라산 조에이지

 

 

법당 근처 연못의

연잎들 위에선

물방울 몇 개 올려놓고 구슬을 만들고 있었다

마침 지나가는 부엉이의 울음소리나

별빛의 푸른 색깔도 조금씩 풀어 섞어가며

그 속에 부처님도 한 분 들여 모시고

세상에서 제일 예쁜 구슬을 굽고 있었다

연한 연잎 위에서

연잎보다 더 연한 물들이 굴러다니며

딴딴한 구슬을 굽고 있었다

 

 


 

문효치 시인

1943년 전북 군산시 출생. 동국대학교 국문학과, 고려대학교 교육대학원. 1966년 《한국일보》와 《서울신문》 신춘문예 당선되어 등단시집 『무령왕의 나무새』『왕인의 수염』『별박이자나방』『모데미풀』『나도바람꽃』등 13권, 김삿갓문학상, 정지용문학상, 익재문학상, 한국시협상 등 수상, 옥관문화훈장 수훈, 한국문인협회 이사장. 국제펜클럽한국본부 이사장, 주성대 겸임교수 역임, 현재 계간 『미네르바』대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