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효치 시인 / 고요
오동꽃에 앉아오시는 저 푸른 그늘을
어찌 간수해야 할지
나무 위에 머물다가 시나브로 흘러내리는 저 푸른 하늘을
어찌 받아 안아야 할지
『어이할까』현대시학 기획시인선2, 2019
문효치 시인 / 노랑어리연꽃
푸른 하늘 깊게 들이마시고 문득 내려다보니 저 물 위에 노란별이 내려와 계신다 몇 억 광년은 족히 되었을 여정 우주의 어느 동네에서 내려오시느라 피곤도 했겠지만 간밤에 잠도 잘 주무셨는지 오늘 한낮 얼굴도 맑다
문효치 시인 / 별박이자나방
등에 외계로 가는 길이 보인다 피타고라스가 걷던 길에 에너지가 모여들어 거대한 별들의 숲이 자라고 우리의 삶이 하늘로 이어진다 이 길에서 권력이 나온다 하늘의 입구에 백로자리가 날개를 펄럭인다 우주의 축이 수직으로 일어선다
문효치 시인 / 왕귀뚜라미
머리 위로 억 광년쯤의 거리 거기에서 떠돌던 소리 한 점 그녀의 방 시렁 밑을 지나 내 귀에 들어와 집을 짓고 있네 소리의 몸에 붙어 있는 수많은 별빛들 여기에 와서 마을을 이루고 있네 귓속에 우거진 푸른 풀덤불 풀덤불 속에 물 좋은 귀신 들어오고 있네
문효치 시인 / 번개오색나비
내 깊은 잠 속에 그대가 만들어 놓은 하얀 길 벼락 맞아 죽어가던 대추나무 뽀도시 살아나 잎 피우고 있네
문효치 시인 / 층층이꽃
집을 짓는다면 몇 층짜리 집을 지을까 3층? 5층? 한 층은 새[鳥]를 들이고 한 층은 구름 들이고 또 한 층은 달도 들이고 나는 그 중 어느 층에 들까 바람의 살 속에 집을 짓는다 바람 따라 집도 함께 사라지면 또 새로 오는 바람 속에 집을 짓는다
문효치 시인 / 미륵사 터의 탑
옥개석에 누워 잠자던 세월이 내려온다. 용화산 소나무 목숨의 한 끝 다쳐 앓고 일어나는데 구겨져 날아다니던 햇빛들 이제는 저 들 끝으로 모도 가버리고 텅 비어 적이 안심되는 평화 요 무언의 땅바닥, 미륵의 세상인가
문효치 시인 / 백제시- 법륭사 석가삼존상
부처님 생각 속에 문득 잠자리 한 마리 날아든다 유년의 우물가 풀대 끝에 앉아 첫 가을의 햇살에 몸을 말리며 나름대로 삶을 번민하던 잠자리 한 마리 들어와 부처님의 생각에 파문을 짓는다 부처님, 한 번 일어났다 앉는다 투웅 앉는 소리가 금당의 천장을 울린다 법고, 범종, 목탁, 풍경, 운판, 목어 덩덩 트엉 딱딱 캥캥 챙챙 토드락토드락 이것들 한꺼번에 일어서서 고함 고함이다 문득 잠자리 한 마리 내 생각 속에 날아든다
문효치 시인 / 백제시 - 구다라산 조에이지
법당 근처 연못의 연잎들 위에선 물방울 몇 개 올려놓고 구슬을 만들고 있었다 마침 지나가는 부엉이의 울음소리나 별빛의 푸른 색깔도 조금씩 풀어 섞어가며 그 속에 부처님도 한 분 들여 모시고 세상에서 제일 예쁜 구슬을 굽고 있었다 연한 연잎 위에서 연잎보다 더 연한 물들이 굴러다니며 딴딴한 구슬을 굽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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