윤석호 시인 / 뱀을 아세요?
뱀이 왜 기어 다니는지 아세요 불안하기 때문이래요 손발 없이 귀머거리로 사는 동물은 또 없거든요 독이라도 품어야 살 수 있지 않겠어요 얼마나 불안했으면 혀가 다 갈라졌겠어요 남의 땅에 사는 것도 마찬가지예요
혹시 은인을 찔러 죽인 전갈 이야기 들어 보셨어요 본능을 장전하면 갈기고 싶어지죠 본능은 의지보다 늘 앞서니까요 하지만 본능보다 앞에 불안이란 게 있어요 그래서 가장 위험한 것들은 불안해하는 것들이래요
독을 품은 것들은 기억력이 없어요 어느 한구석 오목한 데가 없기도 하지만 사실은, 뒷걸음질 칠 수 있는 담력이 없어서래요 이방異邦의 밑바닥에 몸을 대고 살다 보면 굳이 시간을 되새기고 싶지는 않을 거예요
간혹, 숨 막히게 달 밝은 밤이 있잖아요 그런 날이면 통째 삼킨 먹이를 삭히며 똬리를 틀어요 철이 든 거지요 저도 한번 쭉 뻗고 살고 싶겠지요 하지만 마음 놓치면 독을 품긴 힘들어져요 무딘 칼은 피차 고통이거든요
번질거리던 각질의 모서리가 굵게 갈라져 살을 후비며 파고든 어느 밤 제 살갗을 찢어 벗겨 내며 뿌리치고, 쉼 없이 날름거리며 생을 지켜 냈어요 이런 아침은 늘 뻐근해요 눈꺼풀 없이 잔 눅눅한 잠을 말려야 또 하루를 살아갈 수 있거든요 하늘에서 가장 먼 쪽으로 붙어 다니지만 햇살의 따스함을 알고 있나 봐요
[2014 부산일보 신춘문예 시 당선작]
윤석호 시인 / 문무대왕과 아침 산책
바다가 보이는 경주시 양북면 봉길리 끝없는 동해의 푸른 초원이 융단처럼 반짝이며 손을 흔든다.
이른 새벽 문무 대왕릉 바닷가로 당신을 배알하러 나선다.
철썩이는 물결 위 바다에는 옹기종기 수많은 갈매기떼 당신의 혈육인 양 정감의 밀어를 속삭이고, 삼한을 통일한 왕이시여 억조창생 모든 백성의 진정한 어버이시라.
천 년을 하루같이 밀려갔다, 밀려오는 동해의 푸른 물결처럼 당신의 겨레 위한 염원이 하얗게 백사장을 수놓고 있었네.
윤석호 시인 / 중앙청 꼭대기에 태극기가 -육이오-26
9월의 파란 하늘 중앙청 꼭대기에 태극기가 펄럭이고 있었다.
지하에 엎디어 숨죽여 떨던 말못하는 벙어리 초근목피 황달들린 쩔은 얼굴들 눈물 콧물 진범벅 되어서 서로서로 부등켜 얼싸안고 건둥건둥 하늘 높이 뛰어서 흐르는 감격의 눈물바다.
저저마다 외치는 뜨거운 함성 자유의 소중함 비로소 깨친 성난 파도같은 태극기의 물결.
국군과 UN군 태극기의 물결 속을 가고 있었다. 자유의 목멘 울음 속을 가고 있었다.
윤석호 시인 / 종(鐘)
아무도 보지 못하고 감촉하지 못한 향긋한 네 살결이 이 지상의 온 누리에 충만해 있다.
가을날 사르비아의 조으는 꿈속에도 초가집 너흘대는 초롱 속에도 네 향내 하나 가득 설레고 있다.
한밤내 아픈 영혼의 방황 속에 들려오는 마알간 네 음성이여.
천개의 창마다 천개의 음계(音階)를 달고 들려오는 은은한 네 넋이여.
해후(邂逅)의 숲과 별들의 무덤을 지나 어둔밤 작은 불씨로 찾아오는 겔까.
도시의 지붕마다 붉게 칠하고 활활 타오르는 노을을 네 아픈 영혼의 방망이로 지잉지잉 울리는 이 떨리는 향연의 축제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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