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왕노 시인 / 마지막에 대하여
넘치는 잔보다 몇 방울 남은 술에 대하여 노래의 시작보다 마지막 꺼져가는 들불 같은 노래 마지막에 이르러 몸부림치는 네 노래에 대하여 자작나무 이파리에 토닥이다 멀어지는 비 소리 아쉽다며 울음보 터질 듯 우는 청개구리에 대하여 이제는 다시 피어날 수 없는 시드는 꽃에 대하여 개막식보다는 폐막식에 대하여 폐막식에 번지는 어둠에 대하여, 버려져 짓밟히는 꽃다발에 대하여 마침내 진짜라 했는데 가짜로 밝혀진 반지에 대하여 마지막에 대하여 말한다는 것은 아쉽다는 말 하지 말아야 할 말 같고 희비가 뒤섞여 혼란하지만 끝물의 벌판에 와 울던 물새의 노래처럼 애절해 마지막은 함구가 마땅한 것 같으나 마지막이라 한마디 건네야 하므로 엷어지다 사라지는 비행운 너와 오래 사귀던 푸른 시절을 두고 떠나 지금껏 소식 없다는 마지막 네 남자친구에 대하여 용두사미라도 생의 처음보다는 끝에 대하여 끝에 이른 마지막 사랑에 대하여 처음 그리움보다 몰락의 그리움에 대하여 마지막이 서러워 부둥켜안고 울어도 마지막에 대해 때 늦지만 멸종된 진실과 사라진 나라에 대해
시집『도대체 이 안개들이란』(2021, 천년의시작』중에서
김왕노 시인 / 서천으로 간다
마음은 서천 꽃그늘을 찾아 한산 소곡주에 취해 앉은뱅이꽃으로 여생을 보내도 좋다며 간다. 노을에 물들어 서천으로, 서천으로 들판에 푸른 달빛이 흐르듯 간다. 수십 량 그리움을 매단 장대열차처럼 가다가 멈춘 곳에 삼꽃이 핀다.
시집『도대체 이 안개들이란』(2021, 천년의시작』중에서
김왕노 시인 / 흐르는 뼈
아버지 뼈도 거의 삭아 풀꽃을 키우려는 몇 줌 흙을 꿈꾸고 있을 것이다. 흙은 조상의 뼈가 땅에 묻혀 삭고 삭아져 정성스레 만들어진 것이라던 할아버지 말씀 뼈가 잘디잘게 부서져 뼈 강물을 이루어도 천년에 한 치 흐를까 말까 하면서도 뼈 강물 위에 자운영꽃 질경이 달맞이꽃 할미꽃 달개비꽃 피어 우리는 즐겁고 풀을 뜯어먹은 소 울음이 부드러운 것이다. 나도 흐르는 뼈 강물 위에 꽃잎처럼 떠간다. 큰물 지지 않는 뼈 강물 위로 두둥실 떠간다. 지금 천년 뼈 강물 위에 벼가 물결친다. 때로 꿈틀대며 뼈 강물이 용트림 한다.
시집『도대체 이 안개들이란』(2021, 천년의시작』중에서
김왕노 시인 / 반가사유상
이 깊은 밤 고향 집 어머니는 반가사유상이다. 한때 정좌해 TV 드라마를 보시며 몇 초롱 목숨에 심지 담그시고 밤늦게까지 가물거리며 사위어가시다가 지금은 허리가 아프시니 의자에 앉아 홀로 TV를 보시는 어머니 세상에서 가장 아름답고 유일한 반가사유상이다. 밤이면 뒤란에 별똥별 같은 감꽃이 뚝뚝 져 탱화를 그리듯 수놓고 밤새 반가사유상을 지키는 누렁이는 잠을 멀리 두고 귀가 쫑긋하다.
시집『도대체 이 안개들이란』(2021, 천년의시작』중에서
김왕노 시인 / 너를 사랑할 수 없어 나를 사랑하였다
이팝나무 가로수에 꽃숭어리 고봉으로 넘칠 때 너를 사랑할 수 없는 나는 나를 사랑하였다. 손톱을 깎고 머리를 깎고 거울 앞에 서서 너에게 보여줄 수 없는 나를 오래 바라보며 너를 사랑할 수 없어 나를 사랑하였다. 너에게 들려줄 수 없는 노래를 나를 사랑한다며 나에게 들려주었다. 너를 사랑할 수 없으면 장미를 닮은 카르멘, 요정 같은 M 누구를 사랑할 수 있으나 그것은 너를 사랑하는 것이 더더욱 아니므로 나는 네가 사랑하지 않는 나를 홀로 사랑하였다. 나를 내 사랑아, 부르며 애절하게 사랑하였다. 나를 내가 사랑하면 내가 사랑하는 네가 되는 기적이 올까 내가 나만 사랑하면 질투에 이글거리는 눈으로 네가 내게 달려올까 나는 풋사랑처럼 나를 사랑하였다. 너를 사랑하려는 연습처럼 내가 나를 사랑하였다. 네가 사랑해 주지 않는 나를 내가 오래 사랑하였다. 끝내 너를 사랑할 수 없어 나를 미치도록 사랑하였다.
시집『도대체 이 안개들이란』(2021, 천년의시작』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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