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우진 시인 / 무용학교
그 시절에는 토슈즈, 코르셋, 그리고 노을이 있었다. 새들은 검었으며 장미는 로댕 앞에서 피었다. 발은 물결에 놓이고 불에 덴 아이들이 있었다. 지금은 오후 세시 같은 사내가 제일 형편없지만 그 시절 오후 세시에 이사도라 덩컨은 신났다. 무용학교는 다른 학교가 문을 닫는 오후 세시에 봄이 하늘에 굵은 립스틱 한 줄을 긋는 것처럼 색색하게 열렸다. 그녀는 외쳤다. “바다-행복” -물결 위의 소녀, 밤의 리듬인 별, 어둠의 세력인 별, 관능에 몰두하는 바람이 있기에 바다야말로 인간의 몸짓과 가장 깊숙이 관련돼 있다고 할 수 있을지니.
물방울이 떨어지는 춤을 추는 무용가와 흐르는 춤을 추는 무용가가 있다. 우리는 잔을 채울 시간이 부족한 채로 옷만을 적시고 부당하게 된다. 자체로 흐르는 무용가에게서 드디어 잔을 가득 받는다. 그녀의 스카프가 바람에 날리듯이 책이 쓰러져 니체의 문장이 쏟아진다. ‘열정의 변호인’ -우리가 든 차가운 잔에 뜨거운 물. 그리고 한 페이지가 넘어간다. ‘눈의 가르침이 귀의 가르침보다 더 중하고 귀한지고!’ 머리를 푸는 이사도라블즈-자연의 상속자들.
칠흑의 마루에 항아리가 구른다. 편도선이 부은 장미가 긴 목을 뽑아 올리고 있다. 의인화하지 말아야지, 변비에 좋은 시는 자두, 신경질적인 자두라도 자두는 자두 변비에 좋은 시. 무용학교에서 풍금소리가 들린다. 건반을 누를 때마다 무용학교 건너편 풍금아파트에 불이 하나 둘 켜지고 구름엘리베이터가 내려온다. 수사하지 말아야지, 숨쉬기에 좋은 시는 자연, 아무리 어눌한 자연이라도 자연은 자연 숨쉬기에 좋은 시. 칠흑의 마루에 숄이 미끄러진다. 턱을 괴고 있던 이사도라가 벌떡 일어나 시를 춤춘다.
꿈을 만들어야겠어 꿈으로 토슈즈의 입을 막아버려야겠어 무용학교에서 필요한 건 신발이 아니라 리듬이잖아 코르셋의 끈을 잘라내고 날개를 달아야겠어 나를 굴복시키는 것은 오로지 자연 내가 나를 결행하게 하는 것은 자유 시가 분방하여야 하듯이 춤도 그래야 해 어떤 변명이 자연의 침묵을 깰 수 있겠어 춤의 근육을 초승달로 채워야겠어 굽은 나무의 눈 얼음 위의 달밤 시내와 친근한 바람 무용학교를 빛나게 하는 건 태양에스컬레이터에서 내리는 신들의 출근 내가 결행하는 것은 사랑 나를 지탱시키는 것은 맨발
그 시절에 새들은 검었으며 다들 아이를 낳기 전에 결혼했으며 영향 받기를 거부한 새에겐 비난이 덮쳤다. 모욕이 뒤섞였다. 딸을 낳자 도나우 강기슭에서. 아들을 낳자 예세닌. 고든! 장미꽃잎을 흩뿌려라. (그녀의 몸은 불덩이로 변해 이글거렸다) 봄 바다로 뛰어들기 전에 그녀는 율동의 샘에서 목을 축였다. 탐욕이 오기 전에 모독이 가해지기 전에, 그녀는 처음인 양 뛰어올랐다. 북소리가 들리고 푸른 공기 속으로 그녀의 육신이 명주고름처럼 스르르 풀렸다. 그녀는, 그녀의 몸은 춤의 정신에 이르는 도구에 지나지 않았다.
ㅡ한우진 시집 『까마귀의 껍질』(문학세계사, 2010) 중에서
한우진 시인 / 나무와 새 - 십자가의 탄생
발치에 떨어진 새의 노래를 끌어올려 높은 데로 보내려고 나무는 서서 버티는 것인데 꼿꼿하게 수직으로 버티는 것인데, 그리하여 새는 옆으로 나는 것이다 나무의 고통을 전하러 멀리멀리 수평으로 날아갔다가 돌아오는 것이다 가령, 벌목꾼들이 나무를 쪼개거나 숨통을 조이면 거기서 으름씨로 쏟아지는 촘촘한 새의 고백록을 발견하게 되는 것인데 간혹, 숲을 빠져나오지 못한 벌목꾼은 새의 통곡을 뼈저리게 듣기도 하는 것이다
한우진 시인 / 눈 위에 쓴 가족
전근대적으로 눈을 기다린다 눈을 재촉한다 회색 양철지붕이 칼을 물고 나뭇가지를 친다 겨울이냐, 겨울이다
눈이 쌓인다 눈이 그친다 거기에 이름을 쓴다 여편네 이름을 쓴다 여편네도 쓴다 자식 이름을 쓴다 아들도 쓰고 딸도 쓴다 미래의 이름을 쓴다 눈을 밟는다 눈이 녹는다 내가 쓴 여편네의 이름이 사라진다 딸이, 아들이 쓴 먼데 있는 이름도 사라진다 여편네가 쓴 자식 이름은 사라지지 않는다 여편네가 쓴 자식 이름이 사라지지 않는다 눈이 녹은 뒤 나는 여편네가 이름 쓴 자리를 한참 들여다본다 땅이 깊게 패여 있다
한우진 시인 / 겨울의 유서遺書
아무리 들여다보아도 네 글씨체가 아니구나, 아니라며 너에게 뛰어내리는, 너를 어쩌지 못하고 발만 동동, 눈발이 허리를 비튼다. 네가 쓴 자서自序 한 줄도 언제 한번 제대로 들여다보지 않은 내가 어쩌지 못하고 눈발을 맞는다. 눈발이 발목을 꺾는다.
살고 싶다, 살고 싶다, 강이 흐르면서 유서를 쓴다. 나무체였다가 구름체였다가 드문드문 창호지를 바른 얼음 밑으로 너의 서체書體가 드러난다. 살아야겠다, 살아야겠다, 강이 살얼음 물고 유서를 쓴다
|
'◇ 시인과 시(현대)' 카테고리의 다른 글
이소연 시인 / 뇌태교의 기원 외 2편 (0) | 2021.10.20 |
---|---|
김왕노 시인 / 마지막에 대하여 외 4편 (0) | 2021.10.20 |
윤석호 시인 / 뱀을 아세요? 외 3편 (0) | 2021.10.20 |
문효치 시인 / 고요 외 8편 (0) | 2021.10.20 |
허수경 시인 / 왜 지나간 일을 생각하면 외 7편 (0) | 2021.10.19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