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소연 시인 / 뇌태교의 기원
은빛 잠을 수집하는 뇌의 바깥에는 조용한 산책과 쇼팽의 음악이 있습니다 나는 이 세계의 관념으로 머리카락이 자라는 시간을 좋아해요 덩달아 창을 물어뜯는 별자리의 감성을, 나무 위에 앉은 곤줄박이의 감정을, 마당 앞의 바위의 감상을 좋아해요
그때 뇌는 주글주글한 감성과 지성을 가공하고요 나는 뜨개질 가게를 드나들기 시작합니다 바늘코에 걸린 실 한 가닥으로 일요일 붉은 공화국에 대해 점을 치는 거죠
그러나 굴뚝이 아름다운 공장지대로 출근하는 남편의 뒷모습을 보는 것은 피해야 해요 뇌는 풍경을 쪽쪽 빨아 먹고 조금씩 단단해지거든요 참 연한 아메리카노 한잔을 마시면 뇌가 더디게 어제의 풍경을 음미할지도 몰라요
뇌를 호두알로 생각하면 위험해요 뇌는 오 분간의 육류를 꼭꼭 씹는 것을 황홀해해요 하지만 나는 핏줄과 신경, 눈 코 입을 위해 십 분간의 채식을 하지요 식물성은 아이의 성격과 눈동자의 색까지 결정하니까요
나는 감상적인 욕조 속에서 돌고래들의 꿈을 꾸고, 뱃속의 아이는 벌써 뇌태교의 기원을 생각하는지 양수를 동동 차네요
이소연 시인 / 해석의 갈등
똑똑하다는 사람들이 죽을 때까지 몰랐으면 좋겠다 내 아버지가 누군인지 이씨인지, 이씨인지, 이씨인지
어쩌다 보니 이씨만 만나서 사랑했구나
엄마가 말했지
허물 같은 말을 벗어던지면 그 허물 속으로 들어가 죽는 사람이 있어서 영원히 허물을 벗는 중인 말이 있다
언젠가부터 내 몸에 달린 것들 중에서 하나뿐인 것들이 창피하다 하나뿐인 심장 하나뿐인 혀 하나뿐인 배와 하나뿐인 배꼽
엉덩이가 갈라진 이유를 알 것 같다
내일은 오늘보다 나은 죄를 짓고 싶다
자기 배꼽에 낀 때를 자꾸 들여다보면 목이 잘린대 한번쯤은 열어보고 싶은 지하창고처럼 호기심에 문을 열었다가 갇히기 좋지
배꼽이 떨어졌는데 배꼽이 남는다니!
바람 든 무를 사온 내게 꼭 저 같은 걸 사왔대 꼭 저 같은 걸 낳은 사람이
“너도 꼭 너 같은 딸 낳고 살아”
흠이 흠을 낳고 있을 때 이씨는 아버지의 형태가 아니고 이씨는 주인이 아니고 이씨는 우상 없는 이름이요 아버지를 넘어선다
집에 없어진 물건이 있는데 도무지 그게 뭔지 모르겠다
이소연 시인 / 테이블
이 호수는 허구한 날 나를 불러 자기 앞에 앉힌다
“왜 자꾸 불러내” 가장자리를 떠밀려 온 것들은 모두 호숫가 벤치처럼 앉아있다 마음 한 귀퉁이 털어내고 싶어서 물결 진 얼굴을 하고 땅콩 껍질을 바스러트린다 맥주를 따르면서
이 호수는 일어설 수가 없다 대답하지 않는다 그냥 내뱉는 말들마다 잉어 지느러미를 달아 수면 아래로 지나가게 한다 “얜 늙지도 않나봐” 이 호수는 나이 든 남자의 불거진 뼈를 보여줄 때가 있다 환풍구가 없는데 고인 냄새가 자꾸만 사라졌다
두근거린다와 두려워하다가 서로 다른 온도에서 변질되듯이 이 호수 앞에서는 조금씩 다르게 말하고 아주 다르게 듣는다
환기가 안 되는 곳에서도 오염되지 않는 건 너무 오래되어서 새것 같은 단어 몇 개뿐일 거야
내가 만난 호수는 모든 말이 선명하게 흐려져서 좋다 후회하는 싸움들도 좋다
나는 오로지 팔꿈치를 적시려고 당신을 불러다 시를 쓴다
― <작가들> 2017년 가을호 / 시집 『나는 천천히 죽어갈 소녀가 필요하다』(걷는사람, 20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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