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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시인과 시(현대)

김진규 시인 / 대화 외 2편

by 파스칼바이런 2021. 10. 20.

김진규 시인 / 대화

 

 

메마른 나무옹이에 새 한 마리가 구겨져있다

다물어지지 않는 부리 위를 기어 다니는 어두운 벌레들

작은 구멍에 다 들어가지 않는 꺾인 날개가

바람에 흔들리는 이파리들의 그림자를 쓰다듬고 있다

누군가가 억지로 밀어 넣은 새의 몸을 오래도록 들여다본다

나도 분명 그런 적이 있었을 것이다

어울리지 않았던 것들의 속을 채워보기 위해

아귀가 맞지 않는 열쇠를 한 번 밀어 넣어 보듯이

혼자 날아가지도 못할 말들을 해본 적이 있었을 것이다

둥근 머리통을 한참 보다가 눈이 마주친다

이쪽의 눈과 저쪽에 있는 새의 눈이 마주치자,

여태껏 맞아본 적 없는 햇빛이 머리 위로 쏟아진다

머리통이 간지러워져서,

나도 어딘가 머리를 드밀어본 적이 있는 것 같은데

방에서 방으로 옮겨갈 때의 걸음을 생각해보니

나는 언제나 이곳과 저곳의 국경을 넘는 사람인 거 같아

누워있는 사람의 말을 대신 전할 때

구겨진 새의 몸을 손으로 감싸서 누구한테 내밀 듯

나도 어떤 말인지 모를 말들을 했던 것 같아

새의 부리가 날보고 웅얼거리는 것 같아서

내 귀가 어쩌면, 파닥거리다가 날아갈 것 같아서

나무옹이를 나뭇가지로 쑤신다

좀 더 따뜻한 곳으로 들어가라고

삼키지 못할 것들을 밀어 넣듯이 밀어 넣는다

 

[2014 한국일보 신춘문예 시 당선작]

 

 


 

 

김진규 시인 / 또 하나의 건물

 

 

*

오래도록 환하게 불이 켜진 자판기가 마지막 출구인 것처럼 복도의 끝을 지키고 서있다 불 꺼진 건물에선 아직도 떠나지 못한 시간이 있어 의자를 가진 사람들은 언제나 도망갈 방법만 생각을 하지 도망은 가능성이 될 수 있을까 문이 많다 건물이 클수록 문이 많아진다 자꾸만 열어봐야하는 것들에 대해 머릿속에 비상구는 언제나 불이 켜져 있어 달린다 결국 다시 돌아올지도 모른다는 걸 알면서도 달리는 척하고, 또 한 번 창밖으로 한숨을 쉰다 순간 빈손처럼 창 틈 사이로 들어오는 바람 요컨대 거기 바깥엔 아직도 누군가 비빌 손이 있다는 것

 

*

슬픈 예감은 거의 틀리지 않는 것인지도 몰라 다리를 절며 방에 들어온 아비가 어깨뼈를 갈아 끼운다 폭력은 왜 일방적인가 문이 고장 난 날에는 문을 고장 낸 사람은 어디에도 없다 누구도 지목할 수 없었던 시절에 폭력은 왜 일반적인가 아직도 먼 미래만을 기다리는 아이의 일기는 혼자만 하는 밀애가 되어 너는 너에게 편지를 쓴다 편지는 돌아오지 않는다

 

*

가장 어두운 구석에다가 나의 방을 주차한다 늙은 경비가 귓속말처럼 나의 주위를 맴돈다 이번 생에는 거짓말이 없이 살아야지 집에 가라는 여자와 집에 오라는 여자 사이에서 택시를 탄다 바퀴는 구르고 오래도록 우리는 구른다 다시는 만나지 못할 사람들처럼 건물은 불이 꺼지지 않는다 집도 그렇다 방도 그렇다 나는 너무 가까워진 왼손을 옆으로 조금 밀어낸다

 

*

엎드려 자는 남자가 흙더미처럼 무너진다 잠시 꺼두고 싶은 습관들 마음에도 없는 악수만 벌써 수백번이다 우린 조만간 함께 걸어가 꺼지지 않는 자판기에서 무언가 뽑아 마시리라 하지만 지금은 누구도 오지 않는 시간 건물은 문을 잠그지 않고 마른 꽃다발이 부적처럼 걸려있다 다시는 계획을 기회라 믿지 않겠다

 

*

뺨을 맞듯 거칠게 회전문을 지나 다른 방으로 가야한다 나는 너무 오래 불 끄는 일을 잊고 살았으므로 검은 기둥에 기대어 한참을 운다 이번 생에는, 이번 생에는

 

 


 

 

김진규 시인 / 저수지가 묻는다

 

 

우리는 가끔 생각한다

서로의 손마디를 꼼꼼히 살펴보고 싶은 날

아직 오지 않은 나쁜 징후들을 서로에게 묻고 답한다

어쩌면 당장 내일이라도 나의 사진은 마지막 표정이 될지도 모른다며

서로의 손가락을 당긴다 그 순간 허옇게 핏기가 사라지는 얼굴

누군가 둘도 없는 친구라고 말하자, 그때부터

친구는 둘이 되었다 물속의 친구와 물 밖의 친구

이끼로 만든 손이 건네는 악수 미안하다 굳이 코를 먼저 잡을 생각은 없었지만

어떤 식으로든 우리는 바깥에 있는 너와 인사한다

굳은 붓처럼 어깨를 모아 너의 안부를 생각하던 때

가지런한 너의 발이 부평초처럼 우리 머리맡을 떠다녔다

붉은배새매가 울었다 물총새가 울었다 쇠기러기가 울었고,

너는 어딘가에서 둥글게 몸을 말고 있을 것이었다

물은 껍질이 되었고 부서진 나뭇가지가 가끔 뿔처럼 솟아난다

우리는 가끔 생각한다

하나 밖에 남지 않은 앨범에 대하여

하나라고 말하자 정말 마지막 하나가 되어버린 시간에 대하여

친구 하나는 그림을 그린다 그릴 수밖에 없어서

누군가는 이제 가만히 본다 더 이상 가만히 볼 수 없다는 마음에

단단하게 얼어붙은 하늘 구석에서 쇠부리슴새가 지나간다

저수지가 묻는다

우리가 모여서 친구라고 말하자, 저수지가 친구를 묻는다

 

 


 

김진규 시인

1989년 경기 안산에서 출생. 경희대 국문과. 2014년 《한국일보》 신춘문예 당선되어 등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