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명자 시인 / 첫눈
하늘이 주춤주춤 내려오시네 첫발 떼는 아기같이
사람들이 사는 땅은 너무 조심스러워 손바닥으로 하늘을 받쳐드렸네
첫, 이란 낱말 희끗희끗 흐날리네 살갗에 닿자 싸늘했던 피가 달아올랐네
이리 먼 곳을 더듬어 왔더라도 더 먼 곳으로 사라지더라도 그 무엇이 되거라
설령 아무 것이 아니라 하여도 낮고 어둡고 차가운 곳부터 쌓일 테지만
열린 하늘을 기웃거렸네 얼굴을 밀어 넣고 우두커니 젖어보네 눈 닫고 귀 닫고 숨을 참았네 멀어졌던 곁들이 발밑으로 모여드네
고명자 시인 / 봄, 화인火印
울음을 얻으려고 나도 나를 배신해 보았지만
훔친 슬픔을 토해놓는다 얼음 박힌 발가락을 핥는다 가까스로 꽃나무 지번을 하나 얻었으니
골목은 다시 고양이 울음으로 채워졌다 삭풍 가라앉은 나무 밑에서 오래 목을 놓는다
아무렇게나 매달아 놓은 겨울옷처럼 내 소소한 아픔이야 꽃 피면 그만이지만 지나간 계절은 모두 나쁜 꿈 그만 그쳐라 쓰러질라
고물 회전의자도 니야옹 니야옹 운다 터럭 하나 성한 게 없는 것 같은 저 질긴 울음 엉킨 울음 때문에 울컥 달아올라 꽃은 또 무엇을 알아 속속들이 붉어지나
봄밤에 붙어 휘파람 분다 네가 우니 꽃 피고 나도 오랜만에 눈물이 난다
고명자 시인 / 갈치
날빛 흥건한 포구에 닳고 닳은 물결무늬 은빛 레이스
배때기 터진 생선 같아 사랑은 열 번 백번 도망쳐도 보았으나 아가미 벌컥대는 파도 되받아치는 파도
깔치로도 살아봤단다 제 살점 한칼 끊어 술국을 끓이는 것이라 뱃사내들의 신앙이었다 이제 썩은 생선 괴짝처럼 망가져 주막 여인의 오래된 이름은 물결무늬 은빛 레이스
유리알 같은 청춘을 한물간 청춘을 닦는다 닦아도 비린 살 냄새 지워지지 않는다 물때 맞추어 바닷새도 돌아오고 간드러진 웃음으로 뱃사내들을 후렸다는 살결 곱던 그 여인 칼칼한 성질머리 다 죽고 수평선 열어두고 납 밤을 바꿔 살아 보아도 파도만 건달처럼 우쭐거릴 뿐 어깨 실팍한 사내 돌아오지 않았다
고명자 시인 / 사랑
이것은 불의 함정 범람하는 붉은 절정 엉겨 붙은 목덜미에 찬물을 끼얹었으나 젖은 그림자마저 화염에 휩싸이고 말았다 마른번개가 치고 뜰의 꽃들은 타들어 간다 가시 돋친 짐승의 피에서 단내가 났다 혀는 달콤하고 뜨겁고 사나웠다 하여 그들은 전속력으로 고꾸라졌다 눈을 감고 가혹한 그의 이름을 부른다 으깨진 장미들처럼 제의祭儀 대신 서로의 살점을 나눠 먹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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