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명자 시인 / 안부
세상에는 그라는 나무 한 그루만 있었다는 듯 그 밖은 그의 밖은 두꺼운 적막이어라
꽃 피고 꽃 지는 일 그 밖은 참 심심한 봄날이라 흰 홑청 창창한 볕에 얼굴을 대어보는데
꽃가지라면 흰 손목 두어 마디 아프게 꺾어 그 책상에서 저물도록 피어났을 터인데
핸드폰도 잠겨버린 가파른 언저리 꽃 다녀간 어제는 선몽이었고 그는 다른 바깥세상
고명자 시인 / 공수마을 엘레지
봄 여자 머릿수건 미역 냄새
바다, 넋두리 끝낸 늙은이의 돌아앉은 등허리
엎어놓은 소쿠리 속 같은 샛길을 따라, 당신을 따라 달빛 파도가 출렁이는 물속까지 따라 들어가 당신의 정부로 숨어 살고 싶다 쪽마루 있는 허름한 방 한 칸 얻어 한 시절 감쪽같이 행복하겠다
앞만 보고 빠르게 걷는 버릇 때문에 당신은 이따금 나를 놓치고 모퉁이를 돌아 가버리겠지만
미역귀나 뜯어 먹으며 밥 먹여주면 밥 받아먹고 사랑 주면 사랑을 받아먹으며 서러움도, 참 꿀맛이겠다
사람을 끌어당기는 마을 천치 같은 여자가 살아 시를 쓴다며 헌책방 한 구절 문헌으로 낡아간다는 말 듣고 싶다
너무 외로우면 실패한 사랑이라 누군가는 지나가는 말로 제 이력을 들춰내지만
고명자 시인 / 밥과 시
배가 불러야 영혼이 맑다고 뱃구레가 꿀렁꿀렁해야 욕심 없는 시가 나온다고 수화기 너머 건너 온 말이 시의 답일까 나를 휘청휘청 흔들어놓은 사람도 지금 배고픈 자일까
내가 아니었을 적 이랬을까 이가 깨지고 꼬리뼈가 닳았다 그리하여 밥 때를 놓치고 한밤중 마른 밥을 씹는다 고요해서 모래 같은 밥알 목구멍은 포도청이 아니라고 윽박지르는 밥알 칠칠 흐르는 밥알 열이면 열 밥이 더 중하다하는데 나는 주워 먹을 생각도 않고
들창 아래 어둠아 호랑이 불을 켠 뜨거운 울음아 너도 식은 한 숟갈 먹어 볼래 사람과 짐승과 영혼의 영역이 뒤섞인다는 시간 너는 불이 꺼지지 않는 밤의 창문과 같은 종족 같은 고독의 소용돌이 졸아드는 간과 심장과 곤두선 터럭 따위로 소리 내어 어둠을 낭독하는 자 빈 밥그릇 빈 물그릇이라는 뼈아픈 문장 앞에 두손 두발을 얌전히 그러모으고 보이지 않는 쪽을 눈이 빠져라 바라보고 있다는 것
고명자 시인 / 비밀 그리고 검은 비닐
뾰족하고 날렵하고 캄캄한, 도무지 속을 알 수 없는 밤의 물체들이 두렵지도 않니 궁금증을 참지 못하고 냉큼 뛰어올랐니 빠드득빠드득 너의 이가는 소리가 동네 잠을 모조리 깨워놓았구나 투덜투덜 창문이 열린다 누가 길게 침을 뱉네 바람의 옷자락이 춤추는구나 검은 달이 골목에 스미네 얼마나 돌아다녔을까 아랫배가 홀쭉해졌어 밤에서 밤으로만 건너뛰느라 흐물흐물해졌어 담벼락에 찰싹 붙어 서서 누가 야윈 달을 쓰다듬네 입을 맞추네 젖을 물리네 만년도 더 된 벽화같았네
불빛처럼 빤히 노래가 흘러나왔네 들어본 적 없는 슬픈 목소리 단번에 심장을 베인 슬픈 곡조였어 밤늦은 골목을 돌아다니다 아무데나 주저앉고 아무데서나 무덤을 파네 임금님 귀는 당나귀 귀 당나귀 귀 팔 하나 집어넣었더니 검은 싹이 돋았어 침침한 입안에서 꽝꽝 꽃이 피었어 몰래버린 쓰레기봉투처럼 너는 들키고 말았지 나에게 밟히고 말았지 오늘밤만 자고 나면 새가 될텐데 손톱이 자라고 솜털이 자라서 슬픔을 파먹는 검은 새가 될텐데 희망은 이제 너덜너덜 해졌어 차가운 너의 입술은 나무에 매달린 채 썩지도 못할 것이네
고명자 시인 / 거기, 굴업도가 있었네
1 모래의 어미는 누구시던가 선단녀시던가, 소사나무시던가 수수만 겹 파도를 밀고 온 모래 풀뿌리를 움켜쥐고 덕물산을 오른다 흘러내리면, 흘러내리면 또 다시 기어오르는 가파른 모래의 시간 드러눕는 바람의 시간 砂丘는 눈부시다
모래가 모래였음을 망각한 채로 천년은 족히 갯매꽃 갯채송화를 낳았고 만년은 또 여치 사마귀 토끼등을 키웠으니 모래는 발목도 힘줄도 없어졌다 내장 지느러미도 다 없어졌다 먹이고 먹이고 또 먹이느라 가슴 발뒤꿈치 손등도 짝짝 찢어진 굴업도 어미처럼 낮이면 살이 마르고 밤이면 애간장 바짝 바짝 타들어 마침내 가죽만 남은 검은 아비처럼
砂丘여 오, 砂丘여 砂丘를 깔고 앉아 꿈을 꾸는 사람의 얼굴만 비단처럼 부드럽다
2 먼, 먼 옛사람들이 먼저 걸었지 황금 방망이꽃 피는 언덕 넘어 물을 길어 나르고 소사나무 숲으로 편지를 붙이러 같지 간재미 게 민어를 이고 지고 걸어갔지 고기 잡으러 간 남편은 돌아오지 않았지 덜 자란 아이가 동섬 앞바다에서 떠올랐지 어미 아비의 찢어진 가슴이 천 갈래 만 갈래로 길이 되었지 흰 뱀이 스르르 지나간 후 구불구불한 그리움이 생겼지 풍랑에도 새록새록 되살아나는 암각화처럼 오래된 슬픔이 길이 되었지
오솔길은 잠잠 했네 바람이나 풀섶에 타는 노을 속에도 멈칫멈칫 길이 보였네 굴업도에 와서 길을 배웠네 길을 깔고 앉아 다시 길을 생각하였네 사람 하나가 개머리 능선을 넘어 가네 흰 뱀처럼 구불구불한 길로 느릿느릿 멀어지는 사람이 있네
3 소사나무 숲으로 붉은, 붉은 저녁이 온다 바위에다 벼랑에다 뿌리를 박고 무슨 예배처럼 나무들 일제히 바다를 향해있다 바람이 휘감기고 비탈이 휘감겨도 가지는 모래처럼 희다 죽을힘으로 뒤틀며간다 생애를 비틀고 비틀어 나무는 뿌리를 내린다 소사나무의 푸른 궁극은 목숨 지닌 것들을 따뜻하게 품어 주는 것 굴업도를 온전히 감싸 안는 것 높이 날아 고독한 매가 숲 위에 떠있다 마지막 햇살에 푸른 잎사귀들 찬란하다 밤마다 꿈마다 머리맡이 출렁거려도 연평산 아래 몇몇 남은 집에 불이 켜진다 바다를 헤엄쳐 온 흰 코끼리 바위가 소사나무 숲속에 서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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