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 시인과 시(현대)

나금숙 시인 / 사과나무 아래서 나 그대를 깨웠네* 외 3편

by 파스칼바이런 2021. 10. 21.

나금숙 시인 / 사과나무 아래서 나 그대를 깨웠네*

 

 

사과나무 아래서 그대는 나를 깨웠네

나무 아래 사과들은

해거름에 찾아오는

젖먹이 길짐승들의 것

꿈에서 깨어도 사과나무는 여전히 사과

베이비박스 속의 어린 맨발은

분홍 발뒤꿈치를 덮어줘야 해

쪼그맣게 접은 메모지에

네 이름은 사과

그러나 이것은 사과가 아니다*

지을 때까지 지어보려는

파밀리아 성당처럼

사과들은 공간을 만들고

구석을 만들고

지하방을 만들고

삼대의 삼대 아비가 수결한 유언장 말미의 붓자국처럼

희미한 아우라를 만들고,

산고를 겪는 어미의 거친 숨결이

사과나무 가지 사이로

새로운 사과를 푸르게 푸르게 익혀가는 정오쯤

우리는 비대면을 위해 뒤집어쓴 모포를 널찍이 펼쳐서

하늘을 받는다 하늘의 심장을 받는다

이것은 사과가 아니다

 

*아가서 8장 5절 중에서 인용.

*마그리뜨 그림 「이것은 파이프가 아니다」에서 변용.

 

 


 

 

나금숙 시인 / 레일라

 

 

뽈로냐, 분홍돌고래가 뛰어오르는

아마존 강심을

그들보다 더 강렬한 몸짓으로

건너가던 볼리비아 처녀,

독일서 이주하신 할아버지를 닮아

저 고운 잇속과 섬세한 속눈썹이

백화점 지하 커피 매장에서 헤엄친다

알코올 중독 한인 남편을 따라 내린

김포공항 정월 추위가

시댁의 반대보다 더 무서웠다는,

‘삼촌들이 만나기만 하면 싸워요’

서투른 우리말에 눈물이 글썽,

가만히 잡아주는 내 손길에

‘I'm strong…’ 속삭였었지

이구아나 기어가고 분홍돌고래가 춤추는

암청색 강을 그리며

긴 울타리 너머 저녁 식사 청하던

원주민들 목소리를 환청으로 듣는

그녀의 예쁜 두 눈이 지하 매장에서

원석처럼 반짝이네

가공하지 말고 다듬지도 말자

다시 찾아보는 그녀의 이름은 레일라 청정무구,

가난한 남미의 슬픔

못 다 이룬 체 게바라의 슬픔

오늘도 1호선을 타고 서울과 의정부를 오간다

 

 


 

 

나금숙 시인 / 태에 대하여

 

 

다가가 보았더니 실은 썩은 구석이 있는 놈이었지 사과 창고 안에서 가장 향내를 풍기는 놈은 성한 것들 틈에 숨어 산모처럼 상처를 벌리고 있었어 상처 자국은 그의 태(胎), 벌레 몇 마리 향긋한 살에서 기어 나오고 있었어 탯줄 마르는 향이 창고 안에 가득했어 오장에 스미는 캄캄한 향내, 봄부터 양수에 얼굴을 묻고 꼬물대더니만, 이 가을 더욱 싱싱한 물컷으로 태어났구나 날 선 체념에도 긁혀 나오지 않던 너희들은……

 

 


 

 

나금숙 시인 / 처음으로

 

 

같은 강물에 두 번 들 수 없다는 생(生)의 신비를

햇볕과 미풍에 닳아 없어지는 바위에 걸터앉아

느껴본다

이 바위가 산맥의 줄기인 적도 있었다

항상 처음인 신선한 만남이 마모시켜 온

이 단단한 침묵의 몸피,

언제였던가 첫 아이의 어미였다가

첫 밤을 지내는 처녀였다가

초경 치른 볼 붉은 소녀였다가

눈물 그렁한 딸 아이였다가

아이의 팥알만한 젖꽃판에 매달린 물방울이었다가

먼지였다가

차갑게 굳은 바위로 뭉쳐져 솟아난,

 

모든 순간이 새로운 시작이며

모든 물질이 최초라는 기억의 축적이라는 것을

봄 햇살에 더워 오는 강가 바위에 걸터앉아

느껴 보네

유록색 손톱만한 새잎들이 삐죽삐죽 눈 내밀 때

끼르륵 끼륵

가장 맛있는 묵은 열매를 찾았다는 쇠찌르레기의 탄성,

아, 처음 만난 그들 지상의 양식에

나무들 재빨리 건너다니는 저들의 몸짓이

어제도 작년 것도 아닌

시공 안에 단 한 번 새것이어라.

 

 


 

나금숙 시인

1957년 전남 나주에서 출생. 2000년 《현대시학》으로 등단. 시집으로 『그 나무 아래로』(새로운사람들, 2003)과 『레일라 바래다주기』(시산맥사, 2010)가 있음. 서울시 공무원 역임. 웹진 『시인광장』 편집위원, 논술교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