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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시인과 시(현대)

한우진 시인 / 북 외 4편

by 파스칼바이런 2021. 10. 21.

한우진 시인 / 북

 

 

아버지는 북이다 한 번도 북을 두드려 보지 못하고 북을 향해 누웠다 나는 생전의 아버지 앞에서 한 번도 북을 위로 놓고 지도를 펴 보지 않았다 북을 발밑에 깔고 남으로 서울을 지나 괴산, 충주를 손톱으로 눌렀다 피 묻히고 얼룩진 자리가 고향이 아닌가요, 나는 우기고 싶었지만 아버지는 북을 따뜻한 남쪽으로 그리워했다 형편없는 마당이었지만 목련은 피었다 목련은 남을 등지고 북으로만 꽃을 피웠다 아직 맺히지도 못한 나는 아버지 등을 돌려보세요, 이쪽이 따듯한걸요, 남풍이 불어도 아버지는 북을 향해 단추를 풀었다 북창이 많은 집일수록 아버지는 값을 높게 쳐주었다 내가 북리北里에 편지를 써대기 시작할 무렵 북관에서 새들이 날아올랐다 그것 보렴 두드릴 수 있다니깐 그러나 새들은 얼음덩어리로 북적거렸다 아버지는 누가 두드려주지 않는 북처럼 윗목에 놓여졌

다 아직도 아버지는 북이다 어김없이 올해도 나는 북을 향해 아들과 함

께 절을 하였다 아버지 북 받으세요

 

 


 

 

한우진 시인 / 등이 벗겨진 나무는 엎드려 울지 않는다

 

 

1

 

군데군데 어둠에 손을 데인 어머니

늦게 오시고, 숙제는 하지 못했다

다른 집들이 오순도순 숟가락을 부딪칠 때 나는

우물에 가서 감자를 씻었다

교복을 벗지 않고 입은 채로 잤다

꿈이지만, 지겨운 지게야 더러운 지게야, 구덩이를 팠다

 

2

 

알록달록 연애가 끝나고

아내는 반지하 단칸방에 도배를 했다

사진을 걸면서 새가 되세요

와이셔츠 흰색은 빛났다

나는 돌멩이가 핀 구두를 신고

어둠을 내려놓고 오는 버스를 기다렸다

 

3

 

도란도란 사월이 꽃을 낳고

화병에 꽂힌 딸은 두각을 나타냈다

내 등에 꽃잎을 파스처럼 붙이면서 회춘回春하세요

작업복은 회청回靑을 쏟은 듯 좋구나

나는 철공소에서 늦도록 못을 만들고

못대가리처럼 쓰러져 막차로 돌아왔다

 

4

 

이리저리 밥상 겸 책상은 삐거덕거렸다

부푼 꽃, 무거운 꽃, 화병을 놓을 데가 없구나

내 시는 혁명이 지나간 뒤의 깃발처럼 구겨졌다

기울어진 가계家系에 찬바람 드는 창문만 늘어났다

아내는 처녀적 옷으로 커튼을 만들고

덜컹덜컹 나는 낯선 어둠을 묻힌 채 문 앞에서 서성댔다

 

5

 

삐걱빼각 아침이 되자

내가 가지고 온 못은 모조리 녹슬었다

 

2005년 제5회 시인세계 당선작 中에서

 

 


 

 

한우진 시인 / 가구를 바꾸며

 

 

가구를 버리려고 수북한 먼지덩이를 턴다.

가구에 들러붙어 있는 기름때를 닦는다.

가구하고 내통해 본 지도 오래다.

처음에 새것이었을 때, 아내와 번갈아 쳐다보며

예쁘다, 좋구나 하며 말 걸고 쓰다듬었는데

가구도 늙어 상대하지 않으니 먼지만 모아 쓸쓸함을 견뎠구나

처진 가슴 휘어진 다리 외면당한 분풀이로 때만 찌웠구나.

 

아내하고 간지러운 귓속말 더듬어본 지 오래다.

아내의 욕망은 트고 꿈은 자주 삐걱거린다.

아내의 일상에 두텁게 때 낀 지 오래다.

아내는 추억의 연애봉지에 든 세제로 권태를 닦는 모양인데

빛나지 않는 삶은 잘 열리지 않는 서랍이다.

아내의 문 열어본 지 오래다.

아내의 갈망은 굽은 빨래판처럼 뒤뚱거린다

일요일마다 나는 빨래판 위에 빨래처럼 누워도 보는 것인데

아내는 오자誤字투성이 내 몸을 끌어당기기도 하는 것인데,

 

새 가구가 놓인다. 반듯하게 놓인다.

나무냄새와 시너냄새 섞여 방안을 덥힌다.

새것은 무슨 티를 내도 꼭 내네요,

더 닦을 것도 없는데 아내는 자꾸 걸레질을 하면서

어지간히 다 새것인데 사람만 헌것이네요.

 

-이상-제5회 시인세계 당선작들-

 

 


 

 

한우진 시인 / 십자가의 발치에서 그 연유를 듣다

 

 

   발치에 떨어진 새의 노래를 끌어올려 높은 데로 보내려고 나무는 서서 버티는 것인데 꼿꼿하게 수직으로 버티는 것인데 그리하여 새는 옆으로 나는 것이다 나무의 고통을 전하러 멀리멀리 수평으로 날아갔다가 돌아오는 것이다 가령, 벌목꾼들이 나무를 쪼개거나 숨통을 조이면 거기서 으름씨처럼 쏟아지는 촘촘한 새의 고백록을 발견하게 되는 것인데 간혹, 후회의 숲을 빠져나온 어떤 벌목꾼은 새의 통곡을 뼈저리게 듣기도하는 것이다

 

시평 (2005년 겨울호)

 

 


 

 

한우진 시인 / 숯

 

 

   좋은 나무는 산꼭대기에 있단다, 어머니는 내게 고약을 듬뿍 붙이며 혹독한 바람을 견딘 나무가 마디단다, 나는 형들을 제치고 재빨리 어른을 베꼈다 뻘뻘 장남 아닌 장남 땔감 아닌 땔감 청솔가지는 눈을 맞아 푸르렀다 흥청흥청 눈발이 물참나무에서 술을 거르고 불머리를 앓았다

 

  가난은 태우면 태울수록 겨울밤을 견디는 숯이 된단다, 겨울이 시작되자 큰형은 폐병을 꺼냈다 나무에 걸려있던 구름이 제법 을긋불긋해지고 새들은 비린내를 풍겼다 축축한 곳에서는 혼도 녹나기 십상이란다, 어머니는 머리카락을 잘랐고 나는 불을 지폈다 뻘뻘 항아리 안에 형을 안쳤다

 

  눈물이라도 남았냐고 시냇물은 찔찔거렸다 불은요 밟아도 삐죽삐죽 돋는 새싹 같은 걸요, 나는 젖은 채로 된바람과 맞섰다 징집당한 눈발이 자싯물*의 밥알처럼 흩어졌다 어둠이 모이면 나는 불의 유행가를 불렀다 유목**에 걸터앉아 날이 샐 때까지 비릿한 숯을 누웠다

 

* 음식 그릇을 씻을 때 쓰는 물'개숫물'의 방언 (강원 평북 함경)

** 호마(護摩)할 때 불사르는 뽕나무 따위의 생나무

 

미네르바 (2007년 겨울호)

 

 


 

한우진 시인

충북 괴산에서 출생. 2005년 《시인세계》 신인상에〈겨울의 유서〉외 4편이 당선되어 작품활동 시작. 시집으로 『까마귀의 껍질』(2010, 문학세계사)가 있음. 2007년 경기문화재단 창작지원기금과 2008년 한국문화예술위원회의 창작기금 수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