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주 시인 / 시작되는 길이
너는 짧은 줄이다. 길게 잡아당겨도 늘어나지 않는다. 끊어질 수 있으므로 힘껏 잡아당기지도 못한다. 너는 짧은 줄이어서 쓸모가 제한적이다. 그러므로 나는 오랫동안 너를 궁리한다. 머릿속에서 아무리 줄을 만지작거려도 소용없다. 너를 머릿속에서 꺼낸다. 지금부터 시작되는 너는 어떻게도 말할 수 없는 너여서 시작하자마자 끝나고 만다. 짧은 줄의 한계다. 다시 시작한다. 시작을 거듭할수록 너의 길이는 모호해진다. 짧은 줄을 보람으로 여길 줄 안다면 그 줄은 탄성을 가질 수 있다. 탄성을 어떻게 호명하는지 모르는 보람. 길이는 시작되었고 반복되는 불능으로 짧아지는 줄은 너를 묶는다. 묶은 사람만 풀 수 있는 매듭이다
강주, 『흰 개 옮겨 적기』, 달을 쏘다, 2020, 13쪽
강주 시인 / 광합성
r부터 자화상에는 어떤 낯도 어떤 꽃도 어떤 날씨도 없습니까. 생각을 벽돌처럼 쌓아 올린 오후는 추상적입니까. 오늘을
낙서합니다
예측불허의 순간과 계속되는 불일치로 <상형시집>을 읽으며 눈은 피로합니다. 기원전 3만 전은 여전히 궁금하고 지신을 드러내는 궁금증으로부터
착각은 필요합니다. 알면 알수록 오해는 쉽고
하루는 부리와 몸통과 날개 세 부분으로 나뉩니다. 발목이 잘린 새를 지운 건 실수이고 간혹 실수는 뜻하지 않은 결과를 낳습니다
황금알을 낳는 거위의 결말이란
어둠을 찢어야만 반짝이는 별들의 뉘앙스. 바람이 붑니다. 일요일은 휘날리기 좋고 여러 개의 r과 자화상을 섞어 놓습니다
man에서 men으로
뿌리들을 모아 놓은 화분 속 흙처럼 웅크립니다. 그 흙으로 반죽을 만들어 금이 간 벽을 메워나가며
잘 자라고 있는 오늘입니까
강주 시인 / 미성년자
저 바둑알은 흐린 날씨 뚜껑이 닫힌 상자,
더 이상 한 발짝도 다가오지 마, 어제. 보름달을 찢고 있는 어둠이 보이지 않아. 유리창을 가졌니? 본론은 4층이 연결통로야. 마침표가 찍힌 문장들은 죄다 의무감에 사로잡혀
41461-1-10-18-7 독촉장에 찍힌 전자납부번호. 흐린 날씨는 흩어져. 천사의 깃털이 휘날리는 것처럼 눈송이가
흩어지고 다시 뭉치면 바둑알은 옮겨져. 상자의 무게는 상자의 기분. 오, 로라처럼 눈동자에 맺힌 빛의
확신 빛의 답장을 기다렸어
월요일을 떠날래. 월요일 속에는 여름과 실험과 독촉장과 돼지가 우글거리니까. 아무리 떠나도 상자는 뚜껑을 열지 않지. 계속 월요일로 연결되는 4층
함부로 아름다움을 말하는 어른들이 툭, 툭 바둑알을 옮길 때 흰 것과 검은 것이 교차할 때
모서리를 잃어가 밤낮이 바뀌고 있는 상자 속에서,
|
'◇ 시인과 시(현대)' 카테고리의 다른 글
홍신선 시인 / 내 안의 절집 외 6편 (0) | 2021.10.21 |
---|---|
김왕노 시인 / 도대체 이 안개들이란 외 3편 (0) | 2021.10.21 |
황지우 시인 / 해바라기 씨앗 외 4편 (0) | 2021.10.21 |
한우진 시인 / 북 외 4편 (0) | 2021.10.21 |
나금숙 시인 / 사과나무 아래서 나 그대를 깨웠네* 외 3편 (0) | 2021.10.21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