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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시인과 시(현대)

김왕노 시인 / 도대체 이 안개들이란 외 3편

by 파스칼바이런 2021. 10. 21.

김왕노 시인 / 도대체 이 안개들이란

 

 

시도 때도 없이 이 도시에 안개가 자욱하다.

불확실성의 대명사, 안개에 갇혀 발길이 느려지거나

처음 온 듯 사방이 낯설어져

벽을 짚고 서서 불안으로 울먹이는 사람도 있다.

 

백색가루와 연대를 이룬 듯 몽환적이나 무력군단으로

끝없이 침투하는 안개의 계엄군이여.

 

안개가 자욱하게 끼었다 걷힌 후에는

안개가 안개의 수갑을 채우고 가버렸는지 사라진 사람이 있었다.

사랑을 약탈해 가버렸는지 안개가 걷힌 미루나무 숲에서

안개에 젖은 몸으로 뭔가를 찾아 날선 풀잎에 종아리가 베여

피가 흐르는 것도 모른 채 헤매던 영문과 출신 누나도 있었다.

안개는 먼발치의 샛강에서 몽환처럼 피어나야 한다.

안개는 스스로 실체를 밝히며 물고기 풍덩 뛰는 샛강을 지나

풀물 들이듯 서서히 물들이며 와야 한다.

안개가 가진 폭력성은 안개가 걷힌 후 여기저기 충돌로 부서진 차와

새롭게 작성된 실종자의 명단으로 알 수 있다.

 

나의 추억엔 온통 안개가 자욱하다.

안개가 내린 함구령에 굴복하여 천천히 안개로 변해가던 몸뚱이

안개의 작은 미립자가 되어 흩어지던 꿈

내 등뼈를 따라 안개의 이파리가 돋아나 파닥이기도 했다.

나는 안개의 속도로 천천히 안개의 무리가 되어갔고

안개에 둘러싸인 것이 두려워 한때는 울음을 터뜨렸으나

안개에 젖은 눈으로 안개에 뺏긴 넋으로 안개 중독자가 되어갔다.

안개의 힘을 믿었고 안개의 나라를 꿈꾸었다.

누가 안개의 미립자로 흩어져 사라지는 것조차 몰랐다.

 

나는 소스라치게 놀라며 사방을 휘둘러보며 중얼거린다.

도대체 이 안개들이란

안개에서는 죽은 사람들의 냄새가 난다.

안개로 인해 우리는 얼마나 많은 무덤을 만들었으며

비문을 새겨야 했던가.

나는 오리무중 밖으로 안개지대를 지나 충분히 왔다 했으나

아직 안개에 젖어있다.

안개를 피해 지병을 앓는 사람처럼 먼 지방으로 가야 한다.

 

이곳에 뜨는 안개에 젖은 해와 별, 안개에 젖은 관공서가

아직 익숙지 않다.

지금도 나는 저 완강하고 강력한 안개가 두렵다.

 

나는 중얼거린다. 도대체 이 안개들이란

 

시집『도대체 이 안개들이란』(2021, 천년의시작』중에서

 

 


 

 

김왕노 시인 / 5월의 경전

 

 

경전은 오동나무 경전이 최고지

해마다 할아버지 말씀

북벌하고 왜를 수장하라는 오래된 말씀

민족의 대과업에 대한 말씀

보랏빛 오동나무 꽃으로 뚝뚝 져 수놓는

마당은 새벽부터 펼쳐지는 경전이네

 

할아버지 이 좋은 봄날 창을 하며

저승길, 꿈이 아지랑이로 아질아질한 길

입주 한잔 하시고 어깨춤도 추시며

허랑방탕하게 가셔도 좋은데

보랏빛 오동나무 꽃 말씀으로

까마득한 오동나무가지 끝에서 뚝뚝 져

오늘도 또박또박

천년의 경전, 오월의 경전을 쓰시네.

 

시집『도대체 이 안개들이란』(2021, 천년의시작』중에서

 

 


 

 

김왕노 시인 / 꽃잎의 장례

 

 

문득 숲에 들었다가 엄숙한 꽃잎의 장례를 본다.

분분이 휘날리는 꽃잎을 햇살이 염하고

바람이 조용히 안고 숲에 한 구 두 구 누이는 것을

곡비를 자청해 새는 숲이 흔들리도록 울고

나는 숲에 못 박힌 듯 오래 서서 두 손을 모았다.

 

시집『도대체 이 안개들이란』(2021, 천년의시작』중에서

 

 


 

 

김왕노 시인 / 꽃에게

 

 

네가 그곳에 지고지순하게 피어났다는 것은

네게 파란만장이 있었다는 것, 엄동을 건넸다는 것

네가 피니 갈채와 감탄을 보내지만 네가 피기 전까지

겨울을 건너와 눈물에 뿌리 담그고

눈물의 힘으로 분열과 분열을 거듭해 피어났다는 것

어둠을 초월해 눈물 같은 이슬이 맺혀 피었다는 것

엄연히 꽃이 피었다는 말은

반드시 진다는 어두운 미래란 말도 되지만

네 뼈마디 마디마다가 아리는 파란만장이 있었다는 것

내가 여기까지 온 것도 파란만장이 밀었다는 것

 

시집『도대체 이 안개들이란』(2021, 천년의시작』중에서

 

 


 

김왕노 시인

경북 포항에서 출생. 1992년〈매일신문〉신춘문예 당선되어 등단. 시집으로 『황금을 만드는 임금과 새를 만드는 시인』, 『슬픔도 진화한다』, 『말달리자 아버지』,『사랑, 그 백년에 대하여』, 『중독』『사진속의 바다』, 『그리운 파란만장』, 『아직도 그리움을 하십니까.』『게릴라』, 『이별 그 후의 날들』, 『리아스식 사랑』,『복사꽃 아래로 가는 천년』』, 『도대체 이 안개들이란』 등이 있음. 한국해양문학대상, 박인환 문학상, 지리산 문학상, 디카시 작품상, 수원문학대상, 한성기 문학상, 풀꽃 문학상, 2018년 제 11회 웹진 시인광장 선정 올해의좋은시상, 시작문학상 등 수상, 2018년 올해의 좋은 시상, 축구단 말발 단장, 한국 디카시 상임이사, 한국시인협회 부회장, 현재 문학잡지《시와 경계》주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