홍신선 시인 / 내 안의 절집
이 가을 찬비에 온몸 쫄딱 젖은 늙은 고양이가 절집 처마 끝에 은신해 그 비를 긋고 있다.
명부전 뒤 으늑한 어느 땅이 생판 모를 한포기 민들레를 가부좌 튼 무릎 위에 앉히고 서로 체온을 나누며 서로의 온기로 시간을 말리며 화엄 하나 이룬 것을 또 그 옆에는 고목이 고색창연한 제 슬하를 비워 담쟁이덩굴 두어 가닥 거둬 양육하는 것을
내 안의 어딘가 그런 절집 하나 찬바람머리 부슬비 속 그린 듯 앉았다. 이건 내 세월도 아닌데 적막을 착취하는 이 비는 언제 그칠 것인가 속울음 삼킨 고양이마냥.
홍신선 시인 / 오래된 미래
협소한 사무실 창턱에 올려놓은 소형화분에서 철 그른 채송화 몇 송이 피었다. 세상에나, 아침 해들면 여전히 꽃은 송이마다 방석 내다 깔 듯 붉고 둥근 몇 닢 그늘 펴서 깔고 훔쳐 낸다 거기 바닥엔 자잘한 새끼 개미나 부스러기 옛 얘기 두어 토막 뒹굴기도 하는데 적막은 서로 무릎 베고 길게 눕기도 하는데 어느 덧 마실길 떠돌던 미세먼지도 슬몃슬몃 끼어들어 오고 흙 속엔 누군가 듣다 내버린 언제적 귀 한 짝도 터져있어 끼리끼리 한 집안처럼 편히 둘러앉거나 마을 대동회(大同會)처럼 오순도순 모여 떠들곤 한다. 두 손 모은 채 저 따듯한 소국과민(小國寡民)의 압축된 동네 들여다보면서 나도 그만 저 그늘동네에 주민등록 옮겨가 살까. 이내 그늘 걷고 바늘귀만한 씨앗 속 이사 갈 두어 송이 꽃 따라 먼 먼 미래 들어가 살까. 소형화분 늦여름 채송화들 치켜 올린 어깨 너머 유리창 밖 바라보니 그곳 원산(遠山) 역시 허리께 기웃기웃 대던 구름 행객들 엊그제에다 멀찍이 앉혔는지 새삼 볕살 더 느긋한 새참 때다
*오래된 미래-H. 호지의 책 제목을 빌었음. **소국과민-노자가 상상한 이상국가.
홍신선 시인 / 자화상을 위하여
그는 혼자 제 등짝에 채찍질을 가한다 일몰과 땅거미 직전 박모의 때에 그는 남몰래 황금채찍을 꺼내 휘두르고는 한다. 사정없이 옥죄어 오는 서너 가닥 새삼기생덩굴풀로 등이나 종아리를 철썩철썩 내려치며 동통을 온몸의 감각으로 수납하며 그가 이 시간 뒤늦게 지피려는 것은 감각의 잉걸불인가 어느 훗세상의 정신인가 한 시절 그의 혼은 가열하게 맑아서 위경(僞經)같은 별들에 가서 진위를 뒤지듯 말곳거리거나 살의 죄목들을 읽으려는 듯 조도 높은 줄등들을 내걸었다. 이제 치켜들린 그의 겨드랑이께 휑한 초라한 허공이 흉갑처럼 입혀져 있고 힘겹게 마음에서 풀어준 숱한 말의 새끼새들 고작 그의 우둠지께 가서 처박혀 있다. 매일 그는 그 시간에 등판에 허벅지에 동통을 내리찍으며 시간들이 쉴새없이 치고 넘어간 으깨진 시신들처럼 욕망의 설마른 바늘잎들을 떨구고 섰다, 벗어 놓으면 언젠가 다시 짊어질 조막손만한 적요들을. 혼신의 기를 모아 서서 장좌불와(長坐不臥)로 기대어 자며 깨며 생각의 새로운 수태를 기다리는 이 세속에서의 실성실성하는 숨은 어디쯤서 끝나는가 노란 새삼기생덩굴풀로 현수포를 쓴 지빵나무 고사목 한 그루, 중세 고행자같이 제 몸과 마음을 치다가 쉬다가 졸다가 깨다가……
홍신선 시인 / 황사 바람 속에서
너와 나에게 젊음은 무엇이었는가 수시로 입 안 말라붙던 갈한 욕망은 무엇이었는가 아직도 눈먼 황소들로 몰려와서는 노략질하는 것, 짓대기다 무릎 꿇고 넘어지는 것, 나둥그러지기도 하는 것, 낡은 집 고향의 쓸쓸한 토방에서 내다보는 황사 바람이여 오늘은 너의 자갈 갈리는 목쉰 사투리들이 유난히 거칠다 깨진 벽틈 속 실낱의 좀날개바퀴 울음은 들리지 않는다 그 소리들은 외침들은 왜 그리 미미한가 쥐오줌 얼룩든 천정(天井) 반자들이 무안한 듯 과거로 내밀려 앉아 있다 너는 삭막한 하늘 안팎을 뉘우침처럼 갈팡갈팡 들락이는데……
척추 디스크를 앓는 아내와 지방에 내려간 자식은 멀리 네 옷깃에 지워져 보이지 않는다 씨앗에서 막 발 뺀 벽오동나무의 발뿌리에다 거름똥 채워주고 연탄재 버리고 깊은 낮잠 한 잎. 내일 모레쯤 살 속에 밤톨만한 멍울을 감춘 박태기나무들이 종기 짜듯 화농한 꽃들을 붉게 짜낼 것이다 나이 늘어 심은 어린 나무들이 한결 처연하다 낙발(落髮)처럼 날리는 센 햇살 몇 올, 저녁 해가 폐광처럼 비어 있다
운명은 결코 뛰쳐나갈 수 없다는 것 장대높이뛰기로도 시대의 담벽은 넘을 수 없다는 것을 알기까지는 얼마나 오랜 시간이 걸렸는가 그렇게 생각 안채로 들여보내고 하루를 네 귀 맞춰 개어 깔고 무심히 흑백 TV의 풀온을 당기면 떠오르는 화면, 꼿발 딛고 아득히 넘겨다보는 흐린 화면 너머의 더 흐린 화면 그곳엔 무엇이 있었는가 황사 바람이여 지난 시절 그 4․19 5․16 5․17 속에 누가 장대높이뛰기를 하였는가 나는 어디에 고개 묻고 있었는가 비닐 씌운 두둑에 고추모 옮겨 심고 멍석딸기꽃 밑에 마른 짚 깔기 젖먹이 기저귀 갈아주듯 깔아주며 언젠가 풋딸기들이 뾰족한 궁둥이로 편히 주저앉을 것을 생각하는 나날의 이 도(道)와 궁행(躬行)은 얼마나 사소한가 거대한가 풀 먹여 새옷 입듯이 마음 벗고 껴입는.
*풀온 : pull on.
홍신선 시인 / 마음經 9
1 시골집 문창(門窓)에 와서 사륵사륵 귀 속이던 싸락눈 숨 끊듯 멎고 저물녘에야 환히 날 들었다. 내 해골 속 부서진 회로들 엉킨 생각의 올들 일일이 드러나
(이제 살았다) 슬며시 나에게서 나 하나 내쫓기는 소리
2 혀 없는 개울물 소리 가까스로 말 만들어 돌아서 나가는 구름 절벽 끝
성벽 보초병처럼 창검 빗겨든 잔광들이 삼엄하다
3 낡은 마을 설거지 끝낸 집들은 온종일 나가 떠돌던 축생(畜生)들 워어리 워어리 불러들이고 눌은밥 주고 대문 지치고 돌아선 내 등짝 가벼이 가벼이 치는 아직도 잰 걸음으로 울며 떠다니는 안면마다 밝기 최대한 올리고 떠다니는 싸락눈
집 버리고 천지를 온통 제 방안으로 차지한.
홍신선 시인 / 마음經 13
아들이 죽은 뒤 홀어머니는 절에 다니기 시작했다.
텅 빈 내부가 무시로 털썩털썩 떨어져 내리는 대문 닫힌 집에는 저 혼자 섬돌가로 주저앉은 핏기 얇은 입술 꼭꼭 다문 채송화의 검은 씨앗들 속에 핵이, 뉘만 한 무덤들이 차오르느라 부산한 소리
투명한 가을볕 속의 누군가 오랫동안 은밀히 마련해온 이별 같은 먼 독경.
홍신선 시인 / 마음經 38
소태맛은 소태나무 둥근 나이테 안에 태아처럼 웅크렸다 그러고 보면 뭇나무들 만삭이어서 모두 안정 취하고 섰다 가끔씩 어미그루 하복부에 무슨 욕망이 발길질하며 노는지 나무들 진저리치듯 몸 흔든다 그들에게 있는 것은 시간뿐 아직은 서가에서 등표지 해진 책 뽑듯 투명한 시간들 뽑아서 읽거나 덮어두거나 하지만 저 식물 내부에서 은밀히 폭발하는 동물들, 누가 방목하듯 모는지 두, 두, 두, 떼로 달리는 목숨의 발굽소리……
봄숲은 현장보존 잘한 피 튀기는 종축장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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