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춘리 시인 / 석류들
그대 알맹이의 과잉에 못 이겨 반쯤 벌어진 단단한 석류들이여, 제가 발견한 것들의 힘에 겨워 과열된 고매한 이마를 보는 것만 같구나.
그대들이 받아들인 햇빛은, 오, 반쯤 입을 벌린 석류들이여, 긍지에 시달리는 그대들더러 홍옥의 장벽을 깨부시라 하고,
껍질의 마른 황금이 어떤 힘의 욕구에 밀려 과즙의 붉은 보석 되어 터질 때,
이 빛나는 파열은 내가 지녔던 어떤 영혼더러 제 은밀한 구조를 몽상하라 한다.
김춘리 시인 / 외벌 날개
모든 씨앗에는 날개가 잠들어 있다
아직 추운 들판에 내리는 빗줄기, 바짝 마른 날개들이 동글동글 붙어 있다 낙하의 목적을 가진 날개 날아오르는 것이 아닌 빈 곳에 내려앉는 꿈을 가진 날개 방목의 바람, 그 잠깐의 겹에 안착하는 부력이다. 숲 쪽에선 나무들이 쌍발엔진으로 윙윙거린다.
흔들리는 학습에 익숙한 씨앗들 탈피를 꿈꾸는 일에 골몰한 씨앗들 잠든 씨앗을 깨우는 한 철의 주문이 들썩거린다
가볍게 흔들리는 것과 가볍게 부딪치는 마음에 봄빛이 스며들고 있다. 가늠을 주춤거리는 바람의 은율(殷汩)은 씨눈의 지능을 재는 일 껍질을 벗기지 못하면 작심의 화해는 허방이다
씨앗이 돋아날 때 어린 두 잎의 날개를 버린다. 수천 개의 외벌 날개 하르르 털어내고 툭, 터진 밭고랑에 연둣빛 프로펠러들이 뾰족하다.
김춘리 시인 / 경청(傾聽)
나무의 행복지수는 난청에 있다 몸 어딘가에 소리의 씨앗을 삼키는 틈이 있어 이파리들은 반짝거리는 의성어를 갖고 있다
비유에 깃들어 사는 꽃잎들 흘린 소리들이 사는 늙은 나무에 한 계절 귀가 되듯 비스듬히 누운 쪽으로 귀를 닮은 버섯들이 자라나고 있다 균열을 허락한 곳곳마다 눅눅한 소문이 들어차고 있다
방향을 잃은 소리들이 비에 젖어 달라붙고 있는 계절 연골을 오므렸다 펴는 나무의 귀들 종균(種菌)의 언어로 외계의 소리들을 채집한다. 그늘의 문을 열고 소리들이 피어나고 있다
화려한 색깔들, 모두 눅눅한 시간을 지나 온 것들이다. 그늘 쪽에 의탁했던 것들은 색깔이 없다
온 몸을 입술에 빼앗겨 달싹거렸던 소리의 몸짓 혼란을 견디던 무기력에 대해 작고 둥근, 쓰다듬으면 비단결처럼 부드러운 변명에 대해 지금 나무는 경청 중이다.
김춘리 시인 / 고방(庫房)
구름 속 새 들이 숨어 살았다는 흔적이 있는 곳, 틈틈이 말린 계 절을 모아 바깥을 수리한다.
구름의 벽을 세운 뒤 지붕을 덮는 일은 풍경을 뜸 들이는 것. 달군 숯에 꿀 한 숟가락을 넣고 연기를 피웠던 습관을 기억하는 방들이 불룩해 질수록 새의 뼈들은 말라갔다.
몇 줄기 들썩거리는 빛의 마개를 열면 바람소리 나는 매듭은 크고 작은 광주리와 나란히 엮은 시래기 사이를 서성거렸다 쏟았던 태반이 흙이 되고 세월의 무게가 발효된 바닥 어둠속 참았던 눈물을 쏟아내던 곳
어머니 허리춤에 지녔던 열쇠들이 흩어지자 담이 낮아졌다 치부책에 적힌 제사날짜와 빚의 목록들 한 철도 쉬지 않은 대소사며 품앗이가 빼곡하다
덜그럭거리던 열쇠처럼 매달려 있던 시간을 열어보지만 잉크가 말라 잠겨있는 볼펜
먼지 냄새가 쿨럭이는 박명(薄明)의 공간 늘 빗장이 걸려있던 문을 열면 구멍 뚫린 문 사이로 팔락거리던 기억의 조각들이 새의 날개를 짜 맞출 것이다.
김춘리 시인 / 활엽의 저녁
몇 채의 집에서 살고 있는 인적이 어둑한 저녁의 넓은 이파리처럼 흔들린다. 펄럭거리는 어둠에 몇 개의 불빛이 압핀처럼 꽂히고 수 만 장 활엽들이 잠드는 저 집 가벼워진 빨래가 그대로다. 몇 개의 방 중 불이 들어 있는 한쪽의 문에는 구부러진 저녁이 들어 있을 것이다
문이 열리고 닫힐 때마다 방안의 세월도 허리가 굽어간다 천식을 앓던 노인은 미동도 없다 누워있는 관절마다 찬 기운이 가득 들어있다
한 번씩 거칠게 몰아쉬는 들숨이 닳을 때마다 띄엄띄엄 떨어지는 활 엽의 낱장들 자정이 넘은 시간 서너 명의 촌로들이 다녀간다.
몇 명의 사람들과 지관이 둘러보는 햇살 몇 장 깔린 묵은 밭 윗목 허리가 굽은 오전이 따라 내려온다. 바람을 저으며 만장이 숲길로 들고, 올해만도 벌써 두어 명이 이 샛 길로 지나갔다 새인지 구름인지 나무에서 날아오른다.
인기척 없는 뜰에 슬며시 몸 누인 하현달 어둠이 통째로 흔들리는 활엽의 계절.
김춘리 시인 / 삐걱거리는 경첩
집에도 안과 밖이 있어 하얀 창호지를 덮어 쓴 바짝 마른 햇볕이 열리고 닫히며 사람을 나누고 계절을 나누는 풍경이 있다지요.
낯선 곳을 떠돌다 불현듯 눕고 싶은 고요, 안마당 결 고운 비질을 기웃거리고 경계와 흔적이 고인 모퉁이를 헐었던 바람의 깊이가 변명 없이 기울고 있는 마당입니다.
벽과 벽을 통해 하나로 이어지는 집채, 재봉틀로 박음질한 반투명 은조사 옷을 입히면 거꾸로 매달린 다락방 창틀이 달빛을 불러오곤 합니다.
헛기침 소리 간간하던 집안의 바깥이 경직에 머무르는 동안 지극한 공경이 택호를 따라 소반처럼 차려지고 집처럼 생긴 가마가 길들을 불러 모았습니다.
허리 굽은 집엔 남정네들이 서서 일 보는 변통(便桶)이 없었다지요
버려진 것들은 시간이 아닌 공간과 여백을 사모하는 묵언수행입니다.
소통이 필요했던 삐걱거리는 경첩은 추녀마루를 치켜세우고 홑처마 암막새 기와 끝에 옹기그릇을 받쳐 놓습니다. 마른 새끼줄처럼 쇠잔해진 전통, 온기를 다한 가마솥에 불을 지피고 대문을 활짝 열고 마루를 말끔히 닦고 싶은 저녁입니다.
삐걱거리는 나비경첩이 날아가면 집의 구석들은 분가루처럼 날아오를 것입니다.
김춘리 시인 / 염소
선미(船尾)의 멀미가 접안(接岸)에 든다.
배에서 내려 결절된 염소의 울음소리를 따라 간다. 묵묵히 겨울을 끌고 온 동백은 붉은 색깔이 무겁다. 늙은 섬. 늙은 수평선은 염소의 눈에 낮잠으로 든다.
늙은 염소의 뿔엔 바람이 지나간 흔적이 있다 섬에 앉았던 바람, 쉬어 간 바람의 횟수만큼 뿔에 새겨진 눈금들 바람이 들었다 빠져나간 자리인 듯 풀들은 모로 누워 있고 뿔들은 모두 빗어 넘긴 방향을 하고 있다.
미간이 접히듯 파도가 접히는 오후 홍채(虹彩)가 열리는 시간, 섬의 모든 시간들은 수평선으로 달려간다.
섬의 울음들이 단절 음으로 실눈을 뜨고 한 번의 돌진을 위해 칼날 같은 각을 세우는 타지(他地)의 바람들. 그럴 때 마다 수염은 조금씩 자라 슬픔을 쓰다듬었다
울음에는 접안이 없어 그늘에 앉아 쉬고 있는 오후를 지나면
섬의 둥근 어둠이 만수위에 든다. 바다를 떠돌던 어둠들이 섬에 모여들어 캄캄하다 염소의 뿔은 달빛 아래서 굽어지고 있고 붉은 동공에 흰 달이 태연하다.
김춘리 시인 / 악어에게 물리는 꿈
애완으로 고립된 숲에서 산책을 한다. 가장 빠른 진화와 퇴화의 날들이 진열장에 걸렸다 사라진다. 얼룩 없는 화려한 색깔들 악어의 지문처럼 복제된 무늬들은 다한증 손바닥의 축축한 흔적이다 조명이 무늬를 뜸 들이는 동안 부드러운 뱃가죽에선 가끔 기타소리가 났다. 숲은 악어의 눈에 붉은 네온을 켜고 악수를 청했다 한 때 물고 흔들던 주둥이 쪽에 짧은 지퍼가 달렸다 껍질을 벗기면 사라지는 것은 육식이 아니라 몸을 감싸고 있던 껍질.
손톱을 치장하고 치아교정을 하고 사냥에 임하는 무리들 사냥이 금지된 이후 가끔 악어에게 물리는 꿈을 꾸었다 삼천 개의 이빨을 갈아대고 삼천 번의 눈물을 삼키는 야생의 무늬 밀실 어디쯤 부화를 꿈꾸며 하품을 하겠지만 우리 집 구석구석에도 껍질만 남은 명품이 여럿 있다 단단한 가죽으로 지켜 온 이름들에는 쉽게 열리지도 닫히지도 않는 주둥이가 달려있다.
|
'◇ 시인과 시(현대)' 카테고리의 다른 글
나호열 시인 / 그리움의 저수지엔 물길이 없다 외 2편 (0) | 2021.10.22 |
---|---|
김택희 시인 / 와디 외 2편 (0) | 2021.10.21 |
김형로 시인 / 입술 한 컷 외 3편 (0) | 2021.10.21 |
홍신선 시인 / 내 안의 절집 외 6편 (0) | 2021.10.21 |
김왕노 시인 / 도대체 이 안개들이란 외 3편 (0) | 2021.10.21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