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택희 시인 / 와디
오후 들어 내리던 비가 그치면서 녹음 짙은 여름 산에 운무를 깔아놓는다 아주 멀리까지 지켜주던 오랜 배웅 같은 비 젖은 산허리를 돌아오는 길 날 부르는 까만 염소를 두고 온 것도 아닌데 먼 산이 온통 눈산으로 보인다 창밖 언덕배기를 오르는 능소화며 슬몃슬몃 일렁이며 바람을 낳는 수숫대 흔들리며 고여 있는 뒷모습에 물기는 창밖으로 흐르는데 가슴 안쪽으로 축축하다 멎었던 빗줄기가 다시 차창에 몸을 던진다 이제는 기차를 바꾸어 타야 할 시간 가고 싶은 길을 돌아 방향을 바꿀 수밖에 없다는 것이 안타까운지 발길 무겁다 창 너머 벌거숭이산을 뒤덮었던 겨울눈처럼 보일 듯 보일 듯 뭉뚱그려 뿌옇게 보인다 바람조차 삼켜버린 겨울 설산 아니, 여름 안개 산
세상이 나를 이길 때다
- 2013년 <유심> 10월호
김택희 시인 / 소실점
꽃핀자리 환하더니 꽃 진자리 움푹하네 흰 꽃 피웠던 사과의 배꼽 눌려 있네 비탈진 몸짓으로 돌아다보네
애초에서 건너온 시간 돌아앉은 발길들 멀어져 가네 야윈 동행에 봄으로 뻗은 손길 축축하네
김택희 시인 / 경첩
소리 없이 단단해야 한다
모두에서 우리로의 전환접속사
그럼에도 불구하고
모르는 사이
마주하고 있어도 녹이 슨다
—김택희 시집 『바람의 눈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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