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호열 시인 / 그리움의 저수지엔 물길이 없다
출렁거리는 억 만 톤의 그리움 푸른 하늘의 저수지엔 물길이 없다 혼자 차오르고 혼자 비워지고 물결 하나 일지 않는 그리움의 저수지 머리에 이고 물길을 찾아갈 때 먹장구름은 후두둑 길을 지워버린다 어디에서 오시는가 저 푸른 저수지 한 장의 편지지에 물총새 날아가고 노을이 지고 별이 뜨고 오늘은 조각달이 물 위에 떠서 노 저어 가보는데 그리움의 저수지엔 물길이 없다 주소가 없다
나호열 시인 / 너에게 묻는다
유목의 하늘에 양 떼를 풀어놓았다 그리움을 갖기 전의 일이다 낮게 깔려 있는 하늘은 늘 푸르렀고 상형문자의 구름은 천천히 자막으로 흘러갔던 것인데 하늘이 펄럭일 때마다 먼 곳에서 들리는 양 떼 울음을 들었던 것이다 목동이었던 내가 먼저 집을 잃었던 모양이다 잃었거나 잊었거나 아니면 스스로 도망쳤던 그 집 아마도 그 집은 소금이 가득했던 창고 아버지는 비와 눈을 가두어 놓고 바다를 꿈꾸었던 것인지 밤새 매질하는 소리 들리고 눈과 귀 그리고 입을 봉한 소금처럼 우리는 태어났던 것 유목을 배우고 구름의 상형문자를 배웠으니 하늘이 바다이고 바다가 하늘인 것 또한 알 수 없는 일 내가 잠깐 이 생의 언덕 위에 올라 발밑을 내려다볼 때 울컥 목젖이 떨리면서 깊게 소금에 절여 있던 낱말을 뱉어낼 수 있었던 것 여기에 없는, 누구와도 약속하지 않았으나 반드시 지켜야만 한다고 믿어버린 약속이 없었다면 나는 아무것도 기억하지 못하였을 것이다 강열한 햇빝 속에 태어나 그 햇볕으로 사라져가는 소금 등짐을 지고 나는 지금 어디로 향하고 있나
나호열시집<타인의 슬픔>
나호열 시인 / 어느 나무에게
이제 그곳에 가지 않습니다 눈 감고도 먼 길을 갈 수 있는데 왠지 눈앞이 자주 흔들립니다 어느 날에는 한 페이지의 적막을 읽다 오고 또 어느 날에는 민들레처럼 주저 앉아서 솜털 같은 생각들을 날려 보내기도 했었지요 한 그루 나무앞 구름을 타고 가기도 하고 바람을 따라 터벅거리며 한없이 가벼워지기도 했었지요 늘 그는 혼자 중얼거리는 거겠지요 어느 날은 무반주 첼로의 음표를 쏟아내고 어느 날은 낙타의 고향을 이야기합니다
이제 그곳에 가지 않습니다 한 그루 나무앞 스스로 탑이 되어가는 모습에 나는 자꾸 하늘을 우러르게 됩니다 그의 눈빛을 이제 마주 할 수 없습니다 두꺼운 책이 되어가는 침묵을 마주 할 수 없습니다
안녕
나호열시집<타인의 슬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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