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 시인과 시(현대)

나호열 시인 / 그리움의 저수지엔 물길이 없다 외 2편

by 파스칼바이런 2021. 10. 22.

나호열 시인 / 그리움의 저수지엔 물길이 없다

 

 

출렁거리는

억 만 톤의 그리움

푸른 하늘의 저수지엔

물길이 없다

혼자 차오르고

혼자 비워지고

물결 하나 일지 않는

그리움의 저수지

머리에 이고

물길을 찾아갈 때

먹장구름은 후두둑

길을 지워버린다

어디에서 오시는가

저 푸른 저수지

한 장의 편지지에

물총새 날아가고

노을이 지고

별이 뜨고

오늘은 조각달이 물 위에 떠서

노 저어 가보는데

그리움의 저수지엔

물길이 없다

주소가 없다

 

 


 

 

나호열 시인 / 너에게 묻는다

 

 

유목의 하늘에 양 떼를 풀어놓았다

그리움을 갖기 전의 일이다

낮게 깔려 있는 하늘은 늘 푸르렀고

상형문자의 구름은 천천히 자막으로 흘러갔던 것인데

하늘이 펄럭일 때마다

먼 곳에서 들리는 양 떼 울음을 들었던 것이다

목동이었던 내가 먼저 집을 잃었던 모양이다

잃었거나 잊었거나 아니면 스스로 도망쳤던 그 집

아마도 그 집은 소금이 가득했던 창고

아버지는 비와 눈을 가두어 놓고 바다를 꿈꾸었던 것인지

밤새 매질하는 소리 들리고

눈과 귀 그리고 입을 봉한 소금처럼 우리는 태어났던 것

유목을 배우고 구름의 상형문자를 배웠으니

하늘이 바다이고 바다가 하늘인 것 또한 알 수 없는 일

내가 잠깐 이 생의 언덕 위에 올라 발밑을 내려다볼 때

울컥 목젖이 떨리면서

깊게 소금에 절여 있던 낱말을 뱉어낼 수 있었던 것

여기에 없는, 누구와도 약속하지 않았으나

반드시 지켜야만 한다고 믿어버린 약속이 없었다면

나는 아무것도 기억하지 못하였을 것이다

강열한 햇빝 속에 태어나 그 햇볕으로 사라져가는

소금 등짐을 지고 나는 지금 어디로 향하고 있나

 

나호열시집<타인의 슬픔>

 

 


 

 

나호열 시인 / 어느 나무에게

 

 

이제 그곳에 가지 않습니다

눈 감고도 먼 길을 갈 수 있는데

왠지 눈앞이 자주 흔들립니다

어느 날에는 한 페이지의 적막을  읽다 오고

또 어느 날에는 민들레처럼 주저 앉아서

솜털 같은 생각들을 날려 보내기도 했었지요

한 그루 나무앞

구름을 타고 가기도 하고

바람을 따라 터벅거리며 한없이 가벼워지기도 했었지요

늘 그는 혼자 중얼거리는 거겠지요

어느 날은 무반주 첼로의 음표를 쏟아내고

어느 날은 낙타의 고향을 이야기합니다

 

이제 그곳에 가지 않습니다

한 그루 나무앞

스스로 탑이 되어가는 모습에

나는 자꾸 하늘을 우러르게 됩니다

그의 눈빛을 이제 마주 할 수 없습니다

두꺼운 책이 되어가는 침묵을

마주 할 수 없습니다

 

안녕

 

나호열시집<타인의 슬픔>

 

 


 

나호열 시인

1953년 충남 서천에서 출생. 경희대학교 대학원 철학과 박사과정 졸업. 1980년 울림시 동인으로 참여, 【월간문학】 신인상(1986),【시와 시학】 중견시인상(1991)을 받으면서 본격적인 문학활동 시작.   저서로는 『칼과 집』 , 『우리는 서로에게 슬픔의 나무이다』, 『그리움의 저수지엔 물길이 없다』 등 10권의 시집과  사화집 『영혼까지 독도에 산골하고』 등이 있음.  녹색시인상(2004), 한민족문학대상(2007), 한국예총 특별공로상(2007) 한국문협 서울시 문학상(2011) 등을 수상. 현재 경희대학교 사회교육원 교수이며 계간 『시와 산문』 편집위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