맹문재 시인 / 운(運)
이력서를 낸 곳에 시외버스를 타고 이리저리 돌아 면접보러 가는 길 내 이마를 툭 치는, 그것
내게 한마디 하려고 그 멀고도 험한 길을 달려왔다고 생각하니 눈물이 난다
나는 비로소 그것이 들판 그득하게 들어 있는 것을 보았다 나뭇가지에 파릇파릇 살아 있는 것도 새들과 함께 날아오르는 것도 도랑물을 타고 흘러가는 것도 보았다
그것, 꽉 쥐고 있자니 어느새 내 손바닥은 눈물로 흥건하다
맹문재 시인 / 나는 언제까지 혁명의 책들을 골라 올까
나는 여전히 서점에서 혁명의 책들을 골라 오지만 읽지 않는다 텔레비전이나 인터넷에 재미를 들여서도 주식이나 부동산 투기에 몰두해서도 아니다 나는 화투에 중독된 노름꾼처럼 시간을 뒤적이느라 책을 읽지 않는 것이다 시간에 빠진 나는 시간을 보고 시간을 듣고 시간을 추종하느라 정신이 없다 오늘도 시간은 온화한 목소리로 용서하는 마음을 가지라고 더도 말고 덜도 말고 그림자만큼 제자리를 지키라고 불행을 예방주사처럼 맞으라고 내게 기도하듯 들려준다 나는 시간의 당부를 들을 때마다 역정조차 못 내는 진폐 환자가 될 것이라는 생각이 들어 내팽개친 책을 잡는다 그렇지만 시간의 얼굴은 호수보다 넓고 부드러워 또다시 포기하고 만다 칼끝처럼 서 있던 나의 고집은 배부른 아기처럼 잠드는 것이다
나는 언제까지 혁명의 책들을 골라 올 것인가
( 『사과를 내밀다』. 실천문학사. 2012)
맹문재 시인 / 이자는 자란다
담쟁이처럼 자란다 암순응처럼 자란다 바이러스처럼 자란다 안개처럼 자란다 내 입에서 자란다 아내의 손에서 자란다 자식들 눈에서 자란다 가장의 어깨에서 자란다 핸드폰에서 자란다 헌책방에서 자란다 지하철 승강장에서 자란다 학술 대회에서 자란다 은행에서 자란다 출판사에서 자란다 기상청 일기예보에서 자란다 광장에서 자란다
카페에서 자란다 화장실에서 자란다 택시 안에서 자란다 이메일에서 자란다
시외버스 터미널에서 자란다 병원 응급실에서 자란다 슈퍼마켓에서 자란다 분식점에서 자란다
봄에 자란다 겨울에 자란다 새벽에 자란다 야간에 자란다 바람 부는 날 자란다 맑은 날 자란다 꽃 핀 날 자란다 이사 가는 날 자란다 아파트 현관에서 자란다 교차로에서 자란다 가로수처럼 자란다 심사 위원처럼 자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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