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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시인과 시(현대)

유안진 시인 / 내가 얼마나 더 외로워져야 외 5편

by 파스칼바이런 2021. 10. 22.

유안진 시인 / 내가 얼마나 더 외로워져야

 

 

내 청춘의 가지 끝에

나부끼는 그리움을 모아 태우면

어떤 냄새가 날까

 

바람이 할퀴고 간 사막처럼

침묵하는 내 가슴은

 

낡은 거문고 줄 같은 그대 그리움이

오늘도

이별의 옷자락에 얼룩지는데

 

애정의 그물로도

가둘 수 없었던 사람아

 

때없이 밀려오는 이별을

이렇듯 앞에 놓고

 

내가 얼마나 더 외로워져야

그대를 안을 수 있나

 

내가 얼마나 더 외로워져야

그대 사랑을 내 것이라 할 수 있나

 

 


 

 

유안진 시인 / 불침번(不寢番)

 

 

가끔 때로는 자주 어지럽다

지구가 쉬지 않고 돌고 있다는데

왜들 어지럽지 않다는가?

자전自轉에서 공전公轉까지 하느라고

지친 나머지 튕겨나가거나 굴러 떨어질까 봐

걱정하는 누구라도 있어야지

'성질이 팔자' 라는 속언대로

나 하나가 무슨 위안慰安 될까마는

그래도 잠들 수가 없는데

10년 담당의사는 약藥만 바꿔주거나

한두 알씩 보태주기만한다.

 

<<시인시대>>2020. 겨울

 

 


 

 

유안진 시인 / 주름잡으며 살아 왔네

 

 

누워서 먹고 싸는 젖아기가

어느 날 갑자지 제 몸을 스스로 뒤집었다는

젊은 엄마의 자랑을 듣고 듣다가

제정신이 뒤집혀지는 사랑 끝에 생긴 아기는

그 힘을 물려받아 제 몸을 뒤집는가 하다가

 

뒤집어 엎어야 놀라운 자랑거리가 되고말고

내게도 그런 꿈이 있긴 있었는데

세상을 통채로 뒤집어 엎고 싶었던

피 끓던 한때가 분명 있었는데

세상이 어디 그리 호락호락하던가

뒤집어 엎을 그 꿈을 뒤집어 엎느라고

결국은 팽팽하던 얼굴만 뒤집혀지고 말았지

 

뒤집혀서 주름잡힌 얼굴을 비쳐볼 때 마다

세상은 비록 뒤집어 엎지 못했을 망정

내 인생 하나만은 뒤집어 엎었다고

세상을 주름잡으며 살아오진 못했을망정

내 얼굴 하나만은 주름잡으려 살아왔다네

 

 


 

 

유안진 시인 / 간고등어 한 손

 

 

아무리 신선한 어물전이라도

한물간 비린내가 먼저 마중 나온다

한물간 생은 서로를 느껴알지

죽은 자의 세상도 물간 비린내는 풍기게 마련

한마리씩 줄 지은 꽁치 옆에 짝지어 누운 간고등어

껴안고 껴안긴 채 아무렇지도 않다

 

오랜 세월을 서로가 이별을 염려해온 듯

쩔어든 불안이 배어 올라가 푸르러야 할 등줄기까지 뇌오랗다

변색될수록 맛들여져 간간 짭조롬 제 맛 난다니

함께한 세월이 갈수록 풋내나던 비린 생은

서로를 길들여 한가지로 맛나는가

 

안동 간고등어요

안동은 가본 적 없어도 편안 안(安)자에 끌리는지

때로는 변색도 희망이 되는지

등푸른 시절부터 서로에게 맞추다가 뇌오랗게 변색되면

둘이서도 둘인줄 모르는

한 손으로 팔리는 간고등어 한쌍을 골라든

은발 내외 뒤에서서 차례를 기다리는 반백의 주부들

 

 


 

 

유안진 시인 / 눈 오는 날의 편지

 

 

목청껏

소리치고 싶었다

한 영혼에 사무쳐

오래오래 메아리치도록

진달래 꽃빛깔로

송두리째 물들이며

사로잡고 싶었던

한 마음이여

 

보았느냐

보이는 저 목소리를

기막힌 고백의

내 언어를

 

하늘과 땅 사이를

채우며 울림하며

차가운 눈발로 태어날 수밖에 없는

뜨거운 외침을 보았느냐

 

 


 

 

유안진 시인 / 무

 

 

한때는 나도 잘 나가는 잎채소 배추였지

성깔 하나 괴팍해서 어디서나 뒷걸음질 쳐 도망치고 싶었지,

모가지도 몸뚱이도 오그라들고 옴추려 들다가 뿌리채소가 되었지

 

나도 한 시절은 남자 일수 있었지

활개쳐 세상을 휘젓고 쏴 댕기며 기고만장 거친 사내, 그런 나한테

서 달아나고 망명해서 드디어 해방되었지, 해방되고 보니 여자였지

 

나는 결국 지금의 내가 되었지

나는 누구 아닌 나한테서 가장 오해받으며 살고 있지.

 

 


 

유안진(柳岸津) 시인

1941년 경북 안동에서 출생. 서울대 사대 및 동 대학원에서 교육심리학을 전공. 미국 플로리다 주립대학교 대학원에서 박사 학위를 받음. 1965년 박목월 시인의 추천으로 《현대문학》을 통해 시단에 등단. 1970년 첫시집 『달하』를 간행한 이후 『물로 바람으로』 『월령가 쑥대머리』, 『봄비 한 주머니』 등 10여 권의 시집과 시선집을 출간했고, 수필집 『우리를 영원케 하는 것은』 『축복을 웃도는 것』 등과 장편소설 『바람꽃은 시들지 않는다』 『땡삐』 등의 작품이 있음. 한국펜문학상(1996), 정지용문학상(1998), 월탄문학상(2000) 등을 수상. 서울대 아동학 교수로 재직 中.