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안진 시인 / 내가 얼마나 더 외로워져야
내 청춘의 가지 끝에 나부끼는 그리움을 모아 태우면 어떤 냄새가 날까
바람이 할퀴고 간 사막처럼 침묵하는 내 가슴은
낡은 거문고 줄 같은 그대 그리움이 오늘도 이별의 옷자락에 얼룩지는데
애정의 그물로도 가둘 수 없었던 사람아
때없이 밀려오는 이별을 이렇듯 앞에 놓고
내가 얼마나 더 외로워져야 그대를 안을 수 있나
내가 얼마나 더 외로워져야 그대 사랑을 내 것이라 할 수 있나
유안진 시인 / 불침번(不寢番)
가끔 때로는 자주 어지럽다 지구가 쉬지 않고 돌고 있다는데 왜들 어지럽지 않다는가? 자전自轉에서 공전公轉까지 하느라고 지친 나머지 튕겨나가거나 굴러 떨어질까 봐 걱정하는 누구라도 있어야지 '성질이 팔자' 라는 속언대로 나 하나가 무슨 위안慰安 될까마는 그래도 잠들 수가 없는데 10년 담당의사는 약藥만 바꿔주거나 한두 알씩 보태주기만한다.
<<시인시대>>2020. 겨울
유안진 시인 / 주름잡으며 살아 왔네
누워서 먹고 싸는 젖아기가 어느 날 갑자지 제 몸을 스스로 뒤집었다는 젊은 엄마의 자랑을 듣고 듣다가 제정신이 뒤집혀지는 사랑 끝에 생긴 아기는 그 힘을 물려받아 제 몸을 뒤집는가 하다가
뒤집어 엎어야 놀라운 자랑거리가 되고말고 내게도 그런 꿈이 있긴 있었는데 세상을 통채로 뒤집어 엎고 싶었던 피 끓던 한때가 분명 있었는데 세상이 어디 그리 호락호락하던가 뒤집어 엎을 그 꿈을 뒤집어 엎느라고 결국은 팽팽하던 얼굴만 뒤집혀지고 말았지
뒤집혀서 주름잡힌 얼굴을 비쳐볼 때 마다 세상은 비록 뒤집어 엎지 못했을 망정 내 인생 하나만은 뒤집어 엎었다고 세상을 주름잡으며 살아오진 못했을망정 내 얼굴 하나만은 주름잡으려 살아왔다네
유안진 시인 / 간고등어 한 손
아무리 신선한 어물전이라도 한물간 비린내가 먼저 마중 나온다 한물간 생은 서로를 느껴알지 죽은 자의 세상도 물간 비린내는 풍기게 마련 한마리씩 줄 지은 꽁치 옆에 짝지어 누운 간고등어 껴안고 껴안긴 채 아무렇지도 않다
오랜 세월을 서로가 이별을 염려해온 듯 쩔어든 불안이 배어 올라가 푸르러야 할 등줄기까지 뇌오랗다 변색될수록 맛들여져 간간 짭조롬 제 맛 난다니 함께한 세월이 갈수록 풋내나던 비린 생은 서로를 길들여 한가지로 맛나는가
안동 간고등어요 안동은 가본 적 없어도 편안 안(安)자에 끌리는지 때로는 변색도 희망이 되는지 등푸른 시절부터 서로에게 맞추다가 뇌오랗게 변색되면 둘이서도 둘인줄 모르는 한 손으로 팔리는 간고등어 한쌍을 골라든 은발 내외 뒤에서서 차례를 기다리는 반백의 주부들
유안진 시인 / 눈 오는 날의 편지
목청껏 소리치고 싶었다 한 영혼에 사무쳐 오래오래 메아리치도록 진달래 꽃빛깔로 송두리째 물들이며 사로잡고 싶었던 한 마음이여
보았느냐 보이는 저 목소리를 기막힌 고백의 내 언어를
하늘과 땅 사이를 채우며 울림하며 차가운 눈발로 태어날 수밖에 없는 뜨거운 외침을 보았느냐
유안진 시인 / 무
한때는 나도 잘 나가는 잎채소 배추였지 성깔 하나 괴팍해서 어디서나 뒷걸음질 쳐 도망치고 싶었지, 모가지도 몸뚱이도 오그라들고 옴추려 들다가 뿌리채소가 되었지
나도 한 시절은 남자 일수 있었지 활개쳐 세상을 휘젓고 쏴 댕기며 기고만장 거친 사내, 그런 나한테 서 달아나고 망명해서 드디어 해방되었지, 해방되고 보니 여자였지
나는 결국 지금의 내가 되었지 나는 누구 아닌 나한테서 가장 오해받으며 살고 있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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