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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시인과 시(현대)

현종길 시인 / 아버지의 시계 외 4편

by 파스칼바이런 2021. 10. 22.

현종길 시인 / 아버지의 시계

 

 

삼십 년간 숨 멈추었던 아버지의 시계가

내 눈동자를 끌어 당긴다

아버지의 휑한 눈 안에 내가 걸려

내 눈동자가 아버지 속눈썹에 찔린 듯

뜨거운 눈물이 훅 솟구친다

이순을  조금 넘기셨던 아버지

그 아버지의 파란 같은 생이

타임머신을 타고 돌아온 듯

호흡 멈춘 채 장롱 밑바닥에 웅크리고 있다

누구를 기다렸을까 가기 싫은 길이었을까?

나는 그 시계에 밥을 먹인다

타임머신처럼 시계를 거꾸로 돌리면

아버지를 만날 수 있을까

삼십 년이나 죽었던 아버지 맥박이 뛰기 시작한다

 

코에서 쉬익 바람소리가 나고

하얀 암석 같은 얼굴로 떠나시던 날

그날 아버지 숨소리처럼 간헐적으로 뛰는 시계

재깍재깍 쪼개지는 시간의 경계에서

아버지와 나는 그리움의 우주로 하나가 된다

 

 


 

 

현종길 시인 / 노을빛 지팡이

 

 

낮달이 햇살 너머 구름 사이를 달린다

똑똑 하이힐 굽 소리를 내며

갈색 지팡이가 우주를 걸어간다

화목원에 피어 난 겹매화 같은 그녀

노을을 입은 눈과 가을이 든 무릎과 손이

꽃밭의 틈 사이에 콕-콕콕 소수점을 찍는 소리

허공을 찍으며 지팡이가 걸어가고

구름 모자를 쓴 그녀가 걸어간다

“내가 이렇게 될 줄 꿈에도 몰랐어”

아나운서였던 그녀의 푸른 봄날이

그녀 눈 속에서 잠시 겹매화꽃처럼 피어난다

나는 스핑크스의 수수께끼를 진리라고 믿으며

지팡이도 그녀도 나도 화목원에 방점을 찍는다

 

 


 

 

현종길 시인 / 소양강의 선율

 

 

봉의산이 소양강에 내려와

언 몸을 녹이는 오후 세 시

모과차 레몬차를 앞에 놓고

카페테라스 창가에서 겨울 강의 음계를 읽는다

시인들의 미소가 햇살처럼 환하다

긴 탁자위에 짧은 햇살이 주홍빛 낙관을 찍고

카키색모자와 모자 사이에 끼어

화르르 날아오르는 청둥오리 떼

투우사의 스카프처럼 출렁 하늘을 가른다

하늘 행간의 침묵이다

그 행간에서 나는 노을빛 선율의 수정궁을 짓는다

 

 


 

 

현종길 시인 / 자작나무 숲

 

 

허공을 붙들고 하늘에 이르는 자작나무

하얀 경전을 짓는 성소의 기둥이다

하늘과 땅을 잇는 신을 향한 기도처럼

그 숲에 감추어진 신의 말을 풀어낸다

 

흰 뱀들이 하늘로 오르듯 줄지어 선 자작나무

검은 살점의 껍질 잇닿아 길어지는 다리

뱀 같은 허물 말갛게 벗어 버리고

비늘 같은 잎사귀로 하르르 흐르는 물소리

 

산길은 깊어지고 마음 벽 높아 숨이 차다

스스로의 콧날 하얗게 세운 나무숲길 따라

새들의 노래 소리에 하늘이 열리는 숲

잿빛 까만 얼룩무늬에 여름이 들어 훤칠한 키

 

흰 옷 입은 제우스의 음성 그 성소 너머로 울리면

짐승들도 순해질 것만 같은 자작나무숲

햇살처럼 맑아지는 내 마음에

숲은 자일리톨 향으로

내 몸을 부풀리는 자작나무 경전

 

 


 

 

현종길 시인 / 연꽃

 

 

하늘을 지나온 겁劫이거나 찰라거나

우주의 언어들은 연꽃 속에서 햇살이 되고

초록 옥쟁반에 수정 구슬을 담아 굴리는 아침

순한 발 진흙에 묻고 수레바퀴들이 돌고 있다

여름 산 같은 큰 귀 활짝 열어 놓고

이슬방울에 붉은 제 혼을 비춰보는 꽃

꽃잎 위에서 참선하는 그분의 말씀인가

입술 한 번 열지 않고 우주를 들어 올린다

연잎을 지나는 바람이 설법같이 들리는 날

꽃잎 같던 발이 내게도 있었나. 물 흐르는 소리

진흙 벌에서 맑은 혼을 걸러내는 그 분의 물소리

그 물소리 우주로 들어 연꽃잎처럼 하늘 환하다

 

 


 

현종길 시인

2013년 《문장 21》 신인상을 통해 등단. 시집으로 『한 알의 포도가 풀무를 돌린다』가 있음. 신사임당 전국 백일장 (장원). 제17회 김유정 기억하기 공모전 (우수상). 2018 춘천문학상 수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