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종길 시인 / 아버지의 시계
삼십 년간 숨 멈추었던 아버지의 시계가 내 눈동자를 끌어 당긴다 아버지의 휑한 눈 안에 내가 걸려 내 눈동자가 아버지 속눈썹에 찔린 듯 뜨거운 눈물이 훅 솟구친다 이순을 조금 넘기셨던 아버지 그 아버지의 파란 같은 생이 타임머신을 타고 돌아온 듯 호흡 멈춘 채 장롱 밑바닥에 웅크리고 있다 누구를 기다렸을까 가기 싫은 길이었을까? 나는 그 시계에 밥을 먹인다 타임머신처럼 시계를 거꾸로 돌리면 아버지를 만날 수 있을까 삼십 년이나 죽었던 아버지 맥박이 뛰기 시작한다
코에서 쉬익 바람소리가 나고 하얀 암석 같은 얼굴로 떠나시던 날 그날 아버지 숨소리처럼 간헐적으로 뛰는 시계 재깍재깍 쪼개지는 시간의 경계에서 아버지와 나는 그리움의 우주로 하나가 된다
현종길 시인 / 노을빛 지팡이
낮달이 햇살 너머 구름 사이를 달린다 똑똑 하이힐 굽 소리를 내며 갈색 지팡이가 우주를 걸어간다 화목원에 피어 난 겹매화 같은 그녀 노을을 입은 눈과 가을이 든 무릎과 손이 꽃밭의 틈 사이에 콕-콕콕 소수점을 찍는 소리 허공을 찍으며 지팡이가 걸어가고 구름 모자를 쓴 그녀가 걸어간다 “내가 이렇게 될 줄 꿈에도 몰랐어” 아나운서였던 그녀의 푸른 봄날이 그녀 눈 속에서 잠시 겹매화꽃처럼 피어난다 나는 스핑크스의 수수께끼를 진리라고 믿으며 지팡이도 그녀도 나도 화목원에 방점을 찍는다
현종길 시인 / 소양강의 선율
봉의산이 소양강에 내려와 언 몸을 녹이는 오후 세 시 모과차 레몬차를 앞에 놓고 카페테라스 창가에서 겨울 강의 음계를 읽는다 시인들의 미소가 햇살처럼 환하다 긴 탁자위에 짧은 햇살이 주홍빛 낙관을 찍고 카키색모자와 모자 사이에 끼어 화르르 날아오르는 청둥오리 떼 투우사의 스카프처럼 출렁 하늘을 가른다 하늘 행간의 침묵이다 그 행간에서 나는 노을빛 선율의 수정궁을 짓는다
현종길 시인 / 자작나무 숲
허공을 붙들고 하늘에 이르는 자작나무 하얀 경전을 짓는 성소의 기둥이다 하늘과 땅을 잇는 신을 향한 기도처럼 그 숲에 감추어진 신의 말을 풀어낸다
흰 뱀들이 하늘로 오르듯 줄지어 선 자작나무 검은 살점의 껍질 잇닿아 길어지는 다리 뱀 같은 허물 말갛게 벗어 버리고 비늘 같은 잎사귀로 하르르 흐르는 물소리
산길은 깊어지고 마음 벽 높아 숨이 차다 스스로의 콧날 하얗게 세운 나무숲길 따라 새들의 노래 소리에 하늘이 열리는 숲 잿빛 까만 얼룩무늬에 여름이 들어 훤칠한 키
흰 옷 입은 제우스의 음성 그 성소 너머로 울리면 짐승들도 순해질 것만 같은 자작나무숲 햇살처럼 맑아지는 내 마음에 숲은 자일리톨 향으로 내 몸을 부풀리는 자작나무 경전
현종길 시인 / 연꽃
하늘을 지나온 겁劫이거나 찰라거나 우주의 언어들은 연꽃 속에서 햇살이 되고 초록 옥쟁반에 수정 구슬을 담아 굴리는 아침 순한 발 진흙에 묻고 수레바퀴들이 돌고 있다 여름 산 같은 큰 귀 활짝 열어 놓고 이슬방울에 붉은 제 혼을 비춰보는 꽃 꽃잎 위에서 참선하는 그분의 말씀인가 입술 한 번 열지 않고 우주를 들어 올린다 연잎을 지나는 바람이 설법같이 들리는 날 꽃잎 같던 발이 내게도 있었나. 물 흐르는 소리 진흙 벌에서 맑은 혼을 걸러내는 그 분의 물소리 그 물소리 우주로 들어 연꽃잎처럼 하늘 환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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